쥬스틴 이야기 5. 자책의 시작점 그리고 그 안락함을 내 던지다.
가브리엘이 무슨 소리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왜 다 피하고만 싶었는지는 궁금해졌다.
"그러게. 난 다 피하려고 했던 것 같아. 발렌타인의 죽음을 피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
말을 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가브리엘은 커피잔의 티스푼을 계속 휘저었다. 그러다가 입술을 앙 다물었다 풀었다. 입을 떼려는 듯했다.
가브리엘의 시선에서 잠시 휴식하고 싶은 나는 창 밖을 쳐다보았다.
"나무들은 벌써 푸른데… 아. 아야.“
창 밖을 쳐다보며 샌드위치를 먹는다는 것이 입술을 헛씹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실마리를 머릿속에서 당겨보다 따끔하게 정지당한 셈이다.
그런 나를 보며 가브리엘이 묻는다.
"왜? 혀 깨물었어?"
"아니 입술. 입술 안쪽도 깨물고 다른 것도 깨물었나 보네. 정신이 드는 걸 보니. 내가 나를 과대평가했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빵집 커피 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내리며 뿜는 칙칙 쓕쓕 소리에 멀어졌던 우리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가브리엘이 커피 머신을 찡긋하며 쳐다보더니 나를 다시보며 말한다.
"뭔 말이야. 어떤 게 과대평가인데?"
"음... 그 시작말이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을 굳이 통제하려고, 내가 무언가 해보려고 막 발버둥 쳤던 것 자체가 과대평가? 어쩌면 좀 오만에서 시작한 게 아닌가 싶어. “
“오만?”
“응. 잘 들어 봐 봐. 난 일어날 일을 피할 생각만 했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피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 그리고 실제로 일이 일어났을 때, 용기 있게 내 앞에 있는 그대로 마주해 볼 생각은 못해봤던 것 같아."
“그랬구나. 아까 내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라고 말했을 때는 뭔 말이냐는 표정이더니? “
또 커피 머신 소리가 난다. 에스프레소 내리는 ‘징’ 소리에 머리가 조금 혼탁해질 것 같지만 눈을 바로 뜨고 말했다.
“가브리엘 네 말이 맞아. 나폴레옹을 내가 살려 낼 수는 없지. 윌리엄 1세는 더더욱이 어렵겠고. “
“아까는 아무 말 않으시더니?”
“그러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 모든 일이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 범주에 있는 건 아니지. 그렇게 전제한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 같아. “
"뭐 너의 자책은 네가 다룰 수 있는 범주를 과대 평가한 데서 시작했다 이런 말이야?"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 거기서 시작하는 것 같네.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아서. 내가 컨트롤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말이야. 이것이 혼동의 시작이네."
깨물었던 얼얼한 입을 오므렸다 다시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고 빵집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가브리엘에게 꺼내어 보았다.
"뭐랄까, 자책은 혼동에서 시작했는데 이 혼동을 내가 원하는 것 같기도 해. 다 해보고 싶은 거지. 어쩌면 오만하고 싶은 거지. “
“쥬스틴 네 스스로가 원한다고? “
“응 내가 다 해결해 보고 싶고 그런 거. 좋은 마음일 수도 있는데. 네가 아까 인간이 완벽할 수 없다 했듯이, 또 나폴레옹과 윌리엄 1세를 살릴 수 없다 한 것처럼, 내가 닿을 수 없는 범주인데도 욕심내고 해내고 싶은 거지. 근데 그런 게 욕심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네…”
“의욕이 너를 삼키는 욕심이 되고 마는 지점. 그 지점을 잘 찾아보면 되겠네. 어느 순간 나폴레옹을 살리려 하고 있는지. “
“그래 맞아. 그 경계를 구분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 자책하는 행위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임에도 통제하려고 표현하는 것이자, 주장이고 발버둥이랄까?."
"근데 그 주장과 발버둥이 결국 너 스스로를 겨냥하고?"
"그렇다고 봐야지. 그런데 왜 나를 향하지? 근데 또 어떻게 보면 말이야... 아 아니다."
빵을 주문하고 왔다 갔다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꺼내려던 말을 접어버렸다.
그런 나를 보고는 가브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왜? 말 잘하더니 갑자기 멈추고 그래. 다 말해 그냥. 오늘이 날이야."
다 말하라니까 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빵집에서 별 이야기를 다하네.' 싶어 말할까 말까 몇 번을 고민했다.
그리고 어디서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 떠올려 보았다.
“너 외투 떨어졌어. 여기.”
가브리엘이 떨어진 내 외투를 주워주며 말했다.
빵집 바닥에 떨어진 외투와 푸른 바깥 풍경.
6월이 다 되어서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는 지금 계절을 아무도 원치 않는다.
‘맞아. 우린 늘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환경에 있을 수 없는데. 그럼 이상 적인 곳이나 때는 따로 없을 수 있겠네.'
그래서 결국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야. 내가 받아주나 봐. 나 스스로 말고는 그런 표현과 주장을 받아줄 이가 없으니까. 나를 좀 함부로 대한거지. “
“이게 지금 쥬스틴 네 입에서 나온 말이 맞아?”
“그래 맞다. 그리고 어쩌면 슬픔과 아픔 괴로움 두려움 수치심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누를 수 있는 도구로, 자책을 좀 자주 사용한 것 같은데."
"자책을 사용했다라?"
"응. 사용을 좀 과하게 했지. 과도한 사용. 남용? 애용? 애용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뭐 그런 거. 애초에 느낄 이유도 없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까지도 모두 모두 끌어 모아 자책의 바구니에 주워 담고 고이 팔에 끼고 다닌 것 같아. 아니 팔에 낀 게 아니라 안고 다녔나?"
"자책의 바구니라. 뭔가 철학자 같은데. 너 왜 그래 오늘?"
이렇게 말하며 가브리엘이 껄껄 웃는다.
"팔에 낀 바구니가 안락했고 익숙했어. 그래서 곁에 낀 자책의 바구니에 의존했네."
"안락한 자책의 바구니?“
평소에 내가 하지 않는 류의 이야기를 하니 가브리엘이 놀란 눈을 하고 쳐다본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물어본다.
"그러면 그 자책의 바구니를 통해 궁극적으로 안락함을 이루었고?"
"어... 그건 말이지."
모르겠다. 샌드위치를 먹다 접시에 놓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당시를 떠올렸다. 자책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 뒤에 남은 내 마음의 흔적들을 따라가 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자책 당시에 안락함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자책의 바구니는 엉겅퀴를 내어 나를 찌르고 있었어."
“자책은 궁극적으로 너를 위한 것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라는 거지?”
“응. 결국 궁극적으론 자책 자체를 위한 것이었어.”
‘왜 진작 생각을 못했을까?’
"너 뭐냐? 왜 이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냐? 이미 내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냐?"
뭔가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가브리엘에게 삐딱한 말이 나갔다.
"쥬스틴, 우리 서로 안지가 몇십 년인데.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었어도 아무 말 못 했어. 네가 먼저 오늘처럼 다 꺼내 놓을 날을 기다렸지. 예전에는 조금만 말해도 네가 너무 슬퍼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너도 알잖아. 나도 발렌타인이랑 많이 친했고, 나도 슬펐고 힘들었어. 지금도 보고 싶지. 하지만 네가 나보다는 조금 더 힘들 것 같았어."
'그랬구나.'
가브리엘의 마음을 듣고 있으니 마음에 무언가가 뭉클하고 녹는 것 같았다.
녹고 부드러워진 내 마음 속에서 하나를 더 꺼내 가브리엘에게 들어 보였다.
"그런데 말이야. 그걸 쉽게 던지지는 못하겠더라고. 안락한 자책의 바구니."
"어째서?"
"잠시라도 안락하잖아. 또 찾을 수 있잖아. 원할 때마다 찾을 수 있잖아. 없으면 불안해. 자책이라도 하고 있어야 무언가 하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두렵다고 할까?"
내 말을 듣더니 가브리엘이 웃는다.
"너 왜 웃어? 난 심각한데."
"기분 나빴어? 그게 아니라. 나도 자책하고 두렵고 그랬던 것 같아. 말했지? 내가 요즘에 상담과 비슷한 것 받고 있다고. 상담과는 좀 다른데 코칭이라고. 코칭 세션 때 나도 자책과 두려움을 떠올렸거든, 걔네 이름도 지어줬잖아. 몰리토라고. 이름을 지어주니 별거 아니더라고. 그런데 너도 자책과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말하길래. 통했나 신기해서."
"아 그래?"
가브리엘의 웃음은 내 옆에서 같이 어깨동무하는 것과 같은 웃음이었다. 그제야 나는 눈썹에 힘을 풀고 경계도 풀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몰리토, 멋진 이름이네."
그렇게 말하고 나니 뭔가 멍한 것이 진이 빠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야 쥬스틴, 몰리토건 자책의 안락한 바구니건 이제 던져버리는 것은 어때? 나는 몰리토 꺼져라고 말했거든."
"하하. 몰리토 꺼져? 좋네. 나는 안락한 자책의 바구니, 이왕이면 깊은 바다에 던질란다."
그렇게 말하고 나도 가브리엘과 같이 웃고 말았다.
모두 다 뱉고 보니, 엉망으로 섞여있어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몰랐던, 십 수년째 그대로인 꺄브(Cave: 지하 창고. 와인도 보관)를 깨끗이 정리한 기분이었다.
'어라?'
막 삼킨 샌드위치가 요동치는 것 같이 내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느낌이다.
그리고 마음에 오래도록 막혔던 것이 쑥 내려가는 듯한 시원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나도 가브리엘에게 한마디를 해주고 싶었다. 의사로서 친구로서 평소에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오늘은 반드시 해주고 싶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 이제 꺼져 몰리토, 자책과 두려움
[글쓴이의 말: 지난 화에 분량이 길어저 두 화로 나누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네요.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쥬스틴의 마음을 더 살펴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다음화는 크리스마스 바캉스 이후 1월 8일 연재합니다. 다음화를 기다리시는 동안 [글쓴이의 어떤 날들]코너의 별책부록을 확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