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스틴 이야기 6. 이겨내고 이겨냈다 말해봐.
일단 말하기에 앞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가브리엘, 나는 그럼 깊은 바다에 던진다고 쳐. 그럼 너의 그 몰리토는 꺼졌어?”
“나의 몰리토, 내 자책과 두려움? 아유. 꺼지라니까 지하 깊은 곳까지, 지구 핵까지 꺼져버렸지.”
“그래? 그럼 이제 일은 잠깐 접어놓고 좀 쉴 거야?”
내 말을 들은 가브리엘이 먹던 빵을 입 밖으로 뿜으려는 것을 억지로 수습했다. 이때다 싶어 커피를 한 모금 더 하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너 죠나스 알지? ”
“알지."
"전문의 준비할 때 죠나스 안구암 걸렸던 것 알아?"
"응 알지. 너무 고생했지."
“죠나스의 지난 병력 때문에 직업적으로 무언가 부족해 보여?”
“아니 절대 아니지.”
안암을 이겨내고 건강하게 암센터에서 일하고 지내는 죠나스의 모습이 머리에 스치는지,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가브리엘은 선명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봐. 너도 현재 너의 건강상태 때문에 직업적으로 무언가 부족해 보이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문제이지 네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네가 그렇게 오랜 시간 일을 많이 했으면 쉬는 시간이 당연히 필요한 거지.”
“죠나스랑은 상황이 좀 다르지 않을까? 내가 쉬어버리면 지금은 사람들이 원하는 직업적 대응을 바로 못해 줄 수도 있잖아. 죠나스는 그때 아직 전문의 준비 중인 상황이었고 나는 지금 상황이 다르잖아."
역시 내 말에 항상 무언가 찾아내고 꼬집어 묻는 가브리엘. 한결 같이 아플 때이든 안 아플 때이든 똑같다.
‘이야기를 꺼낸 지금 멈출 수 없어. 밀어붙여야 해.’
"내가 보기엔 안 다른 것 같은데. 아플 수 있는 상황이 있고 아플 수 없는 상황이 있을까? 그리고 아픈 상황에 아프고 안 아플 상황에 안 아플 수 있나?”
“그런 다양한 때와 시기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
“난 잘 모르겠는데. 이건 시기를 따질 것이 아니라, '네게 그냥 일어난 일' 아니야?”
“나에게 일어난 일이라…”
“네가 아까 나한테 말한 것처럼 그 일을 그저 마주하고, 겪고 이겨내 보는 것은 어때?"
"오 쥬스틴, 아까 빵집 들어올 때랑 너무 다른 거 아니야?”
“아 가브리엘 너는 진짜. 에휴... 나는 네가 좀 쉬고 몸이 낫고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중에 돌아왔는데 회복한 니 몸이 네 약점이 아닐 거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 이겨낸 것이 어떻게 약점이 되겠어.”
“흐흐 걱정 마. 빵 먹으면서 마음이 바뀌었어. 빵이 이렇게 맛있는데, 맨날 급하게 먹느라 이런 빵맛을 내가 한참 동안 모르고 살았다니. 이제 빵 맛도 느끼면서 살 거야. 클라이언트 건 뭐건 뺏고 싶으면 뺏으라 해. 회복이 중요하지. 내가 지금 그런 거 생각하게 생겼냐. 내 목숨이 중하고 건강이 중요하지 뭐가 더 중요할 수 있겠냐. 사실 며칠 전부터 많이 고민했어. 너랑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결정 난 것 같네."
“가브리엘, 그렇게 다 잘 아는 애가 세 번 쓰러질 때까지 뭐 했냐?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네 몸은 왜 안 돌보았어?"
난 정말이지 가브리엘이 신기하다. ‘자기 객관화도 잘되고 상황파악도 빠른데 저런 애가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몸을 왜 저렇게 혹사한 거지?’
“비난을 위한 비난은 거절한다 쥬스틴.“ 내 말에 직접적인 대답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브리엘의 장난 섞인 말투에 무언가 마음이 놓였다.
“알겠다 그래. 우리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두꺼운 외투를 다시 껴 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가브리엘도 다시 약을 타러 가야 해서 같이 병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왜 이렇게 불지?”
“그러게. 이거 뭐 거의 11월 날씨 아니니? 올해 여름은 없는 건가? 누가 이게 5월 말 날씨라고 생각하겠어.”
“왜 날은 맑고 밝잖아. 춥고 바람 불어서 그렇지.”
“쥬스틴 기억나? 우리 학부 때 8월에 긴팔 두껍게 입고 다녔던 해.”
“아 끔찍하다.”
“그치. 올해가 그 해 같지 않기를 바란다. 그 해에 딱 2주 더웠어.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어.”
병원에 금세 다 왔다. 병원에 와서 보니 원래 오후 시간에 예정되어 있던 온라인 컨퍼런스가 취소되었다. 그래서 외투만 방에 올려다 놓고 1층 홀 대기실에 가브리엘과 같이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의 남성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닥터 비지에, 반가워요.”
나에게 말을 거는 순간 이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났다. “오, 안녕하세요 무슈* 말라드로아.”
“의사 선생님이 왜 여기에 앉아 있어요? 선생님도 아프신가 보네 쯧쯧.”
“네…? 아, 아니요. 저는 여기…”
“아이고 앉아요 앉아. 왜 일어서요. 설명 안 해도 돼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앉아 있는 것 보니까 많이 안 좋은 것 같네. 얼굴도 심각해 보여. 어서 낫길 바라요.”
“어… 저…” 대답을 하려는데 무슈 말라드로아는 커다란 미소와 함께 급하게 출구 쪽으로 향해 걸어가 버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는 나를 보는 가브리엘이 막 웃었다.
“하하 쥬스틴, 뭐냐 저 아저씨? 네 환자야?”
“어 그렇긴 한데 뭘까.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닥터 쥬스틴 비지에, 완전 웃겨.”
“가브리엘, 나 지금 외투도 벗었고 가운도 걸치고 있는데, 나 환자 같아?”
“게다가 너 방금 안락한 자책의 바구니도 빵집에서 깊은 바다로 던지고 왔는데 말이지.”
“놀리지 말고 가브리엘. 아놔 진짜.”
"네 환자 대기실에 앉아있으니까 아픈가 보다 한 거겠지."
"환자 대기실에 환자랑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을 수도 있지. 여기 앉아있다고 해서 왜 꼭 내가 아픈 사람이 돼."
"뭐 쥬스틴 네 오늘 몰골이 환자 같아 보이나 봐 하하."
가브리엘의 놀리는 말을 계속 듣고 있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무슈 말라드로아가 황급히 다시 병원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 한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닥터 비지에, 다행히 아직 여기 있네.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우리 다음 약속 전까지 하라고 한 검사. 이 서류로 다 되나요? 다 안 적혀 있는 것 같은데.”
“이거 맞습니다. 여기 젤 위에 적혀 있는 이 단어가 관련 검사를 다 포함한다는 뜻이에요.”
“아아. 고맙습니다 닥터 비지에. 그런데 아까 내가 못 물어봤지. 많이 아파요? 여기에 있고.”
“안녕하세요 무슈 말라드로아, 저는 닥터 비지에 친구 가브리엘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닥터 비지에의 아픈 곳은 30분 만에 다 나았어요. 점심에 빵 먹을 동안 말이에요. 이제 안 아파요.” 가브리엘이 끼어들어 말했다.
“아.. 어… 30분 만에 아… 하하. 안녕하세요 가브리엘, 반갑습니다... 아 그렇구나 의사니까 하하. 어…흠흠. 가브리엘도 여기 병원 의사이신가요?”라고 무슈 말라드로아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뇨. 저는 의사 아닙니다. 사실 제가 아파서 병원에 온 거고 닥터 비지에는 잠시 저랑 같이 앉아있던 거예요. 방금은 제가 재밌으시라고 농담한 거고요.”
“아 그러시구나. 하하. 친구분 재미있으시네요. 닥터 비지에, 그리고 가브리엘 저는 가보아야겠어요. 아까 갔어야 했는데 너무 지체했어. 다음에 보아요.”
그렇게 말하며 무슈 말라드로아는 부리나케 병원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가브리엘 고맙네. 오해는 풀렸어.”
“재미있으신 분이네. 나도 그럼 재밌게 대답해 드려야지.”
“근데 놔두지. 무슈 말라드로아 좀 당황하시지 않았으려나. 많이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데 다음 진료 오시면 말씀드려도 되는데.”
“널 걱정해 주시는 분인 것 같긴 해. 그리고 자기 생각도 바로 말씀해 주시고 솔직하고 따뜻하시네. 그래서 나도 무겁지 않게 농담을 건넨 거지. 그치만 아까도 안 듣고 그냥 가셨잖아."
"그래도 좀 놀라신 거 같아서. 그분 생각은 자유잖아."
쥬스틴의 대답에 잠시 멈칫하던 가브리엘. 입술을 힘주어 다물었다 결심한 듯이 말을 꺼냈다.
"자유라... 음, 그럴 수도. 그리고 아닐 수도. 생각은 자유지만, 생각까지만 그런 거 아닐까? 말을 꺼내는 순간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어. 자유로운 생각을 근거로 하는 다음 동작부터는 사회에서 제한되잖아. 말이나 행동은 생각과 달리 자유롭지 않다고. 그에 상응하는 어떠한 책임이 따를 수 있으니까."
"뭘 또 그렇게까지 그래. 저분은 그러시다 말겠지. 다음에 만날 때 까맣게 잊어 먹으실지도 모르지. 글구 남의 일이니 그냥 한 말 아닐까? 특별히 잘 모르기도 하고 그냥 할 말이 없어서."
"할 말이 없어서? 남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처럼 공공장소에서 저렇게 이야기한다고?"
"아이고 아니 여보세요. 아까 말해준 건 고마워. 근데 나는 괜찮다고. 괜히 자유라고 했다가 잔소리만 실컷 들었네. 내 말은, 저분이 뭐라 하건 나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고. 내가 아픈 게 아닌데 저 사람이 아프다고 말한다고 내가 아픈 사람이 되냐고. 그리고 내가 하는 말들도 너무 그렇게까지 분석하지 말고, 조금 흐리게 들어봐. 그냥 좀 살자. 아 근데 지금 직업 모먼트야? 글구 내 이야기 말고 네 이야기를 그렇게 하면 되겠구만. 치료받을 것 받고 회복하고 남들이 오해하면 지금처럼 이야기하면서 오해를 풀면 되겠구만. 나만 변호해 주지 말고 너도 변호하시라고요. 나는 네가 이러는 게 더 불편해 아까 그 상황보다. 네가 이렇게 따지고 하나하나 파고들면 마음이 불편하다고. 아까 그 사람은 그냥 이 병원에 오는 환자고 너는... 너는... “
“나는 뭐?”
가브리엘이 눈썹을 치켜뜨고 날카롭게 말했다.
“너는… 그런 게 아니잖아."
눈썹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던 가브리엘이 쥬스틴의 말에 서서히 힘을 풀고 입가에 미소 띠었다.
"그런 게 아니면 뭔…데? 흣“
그리고는 씽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쥬스틴, 근데 나도 방금 그랬잖아. 저분이 너를 걱정해 주시는 것 같다고. 따뜻하고 솔직하신 분 같다고. 그치만 그거랑 지금 내가 하고있는 이야기는 좀 다른 것 같아."
"아휴 그래. 난 방금 겨우 자책의 안락한 바구니와 빠이빠이 하고 왔다고. 너무 혼내지 말라고."
"억울해. 난 널 혼낸 것이 아니라 너의 생각을 듣고 내 생각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아 몰라. 쥬스틴, 너도 이제 가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가브리엘, 지금 네 건강 상태는 그런 게 아니잖아. 어떤 줄도 잘 몰랐으면서... 앗, 근데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야야 나 이제 올라가 보아야겠다.”
“그래. 얼른 올라가.”
“응. 연락하고.”
급하게 일어나서 걸어오는 길, 뒤에서 벨 소리가 들린다.
“아, 그 회의? 해야지.”
‘가브리엘 목소리인데. 일 안 한다고 해놓고서는… 쟤는 요즘 희한한 날씨랑 똑같네.’
며칠 후면 여름을 맞이하게 될 5월 말 풍경이지만 온도는 늦가을, 아니 초겨울 같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를 이 이상기후가 가브리엘의 시간에 그대로 겹쳐 보이는 듯했다.
*무슈 (Monsieur): 프랑스어로 성인 남성을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 영어의 미스터와 유사한 말.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 이제 꺼져 몰리토, 자책과 두려움
[글쓴이의 말: 이번 에피소드 역시 몰리토 연재 시작 전 미리 써두었던 글인데, 예고드린 대로 연말 바캉스를 보내고 이번 주에 수정을 마쳤습니다. 에피소드 속 사건들은 원안 그대로지만, 지난 화 댓글에서 "가브리엘과 쥬스틴이 싸울 것 같았다"라고 말씀해 주신 작가님의 의견에 아이디어를 얻어 두 사람의 대립각을 조금 더 세워보았습니다. 사실 훨씬 심하게 다투는 장면까지 만들어 보았다가, 이 정도 선이 가장 적절한 것 같아 멈췄습니다. 독자님, 작가님들의 코멘트가 글을 다듬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