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로 아픈 날들이 있다. 그 일에는 나를 불편하게 하고 지치게 만드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일종의 새로움이 있어 나를 자극하기도 한다. 어떤 종류의 아픔이든 내가 겪어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를 필터 삼아 아픈 사건들을 소화해 내는 방식도 있고, 의미를 깨닫기 전 잠시 미뤄두는 방법도 있다.
어떤 것이 쉽고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고, 어떤 선택을 했다고 해서 우리는 곧 무너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내 경험상 조금 덜 힘들게 살아가는 쪽은, 미루지 않는 편이었다. 미뤄둔 일들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다른 사람과 다른 상황의 얼굴을 하고 비슷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곤 한다. 반복되는 패턴에 가깝다. 두 번 고생할 바에 차라리 한번 고생하는 건 효율이니까.
구구절절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짧은 단상을 적은 이유는, 그럼에도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일들을 마주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연속적이라면 더 그렇다. 그 일이 사람과 관련될 때 더 그렇다. 이번 일도.
상황을 판단하는 일은 어쩌면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적당히 잘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는 직관도 이성적 사고도 먹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어 적잖이 당황스럽다. 특히 나의 행동을 상대방 쪽에서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 경우, 제대로 설명하는 일조차 어렵다. 상대의 감정이 나의 논리를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은 이번 이별도 예상치 못한 부분이 컸다. 미리 판단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 멍했다. 내가 원하던 결론이 아니었는데도 어느 순간 결론이 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자꾸만 문제처럼 떠올랐다. 바뀐 건 상황인데, 생각은 계속 나를 다시 보게 되는 쪽으로 흘렀다.
새벽,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카페에 들어가 혼자 한동안 커피잔 앞에 앉아 있었다. 가까운 과거의 내 행동을 돌아보며, 도대체 어디가 문제였을까 반추해보기 시작했다.
말로 전하는 다정함은 내 사람만을 대하는 특별한 일이기에, 이성에게는 웬만하면 침묵을 유지하는 편이다. 또 귀찮은 것, 비효율적인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내가 일을 처리해 버리는 경우들이 많다. 여기서 오해의 지점이 생기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흔히 말하는 츤데레라고 하던가. 내가 말없이 취한 행동이 친절로 읽혀, 상대의 마음을 건드린 것은 아닐까 싶다.
저런 생각을 한 이유가 있다. 어제 고백을 받았다. 이브에 고백이라니. 그래, 분위기상 그럴 만한 날이긴 하다. 하지만 진짜 예상치도 못했다. 내가 뭘 했길래 싶기도 했고, 동시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직은 이런 날에 내게 먼저 떠오르는 건 다른 사람인데 상대가 꺼낸 건 고백이었다. 그 무게감 있는 말 앞에 내가 꺼낼 수 있는 건 확신이 아니었다. 이별한 지 얼마 안 됐고,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라 상대는 내가 최근 겪은 일들을 모른다.
그래서 그냥 안 된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그 말 외에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수록 내 모습을 드러내야 했고, 괜한 여지를 줄까 봐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한마디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새벽 내내 생각하게 됐다.
“영생과 영면의 차이를 너는 알고 있니?”
영원을 공통점으로 하는 두 단어의 차이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하나는 이어짐이고, 다른 하나는 닫힘이다. 저 가사처럼 단어 둘의 대조만로도 사유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단어 하나가 가진 양면성으로도 생각은 시작된다. 어제 새벽 내게는 ‘미안해’라는 말이 그랬다.
‘미안해’라는 말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해야 진실한걸까? 왜 어떨 땐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는 회피가 되는 걸까? 아마 ‘미안해’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상대를 살피기 위해 다음 말을 붙이는 미안함, 그리고 모든 말을 끊기 위해 문을 닫는 미안함.
어떤 설명이나 솔직한 고백으로 이어지지 않는 미안함은 상대에게 답답함과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 말이 최선이었는지와 별개로,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그 말을 했다. 애써 상대를 밀어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지금은 마음의 공간이 없어서. 하지만 상대는 그 차이를 알 길이 없다. 상처는 언제나 내 의도와 무관하게 먼저 도착하니까.
사실 설명이 필요한 '미안해'는 분명히 필요하다. 책임의 문제 때문에 그렇고,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꼭 해야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구와의 관계 그 외 여러 관계들 안에서 개선과 회복을 위해서 말이다. 자신의 자존심과 감정을 내려놓고서 최선을 다해 그래야 할 때가 있다. 중요한 건 변명이 아니라 설명이어야 한다.
사람이니까 모든 관계 앞에서 늘 그럴 순 없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연인 사이에서 이별의 순간만큼은, 상대를 배려한다면 진정한 마음으로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떠나는 순간만큼은 상대가 스스로를 탓하지 않도록,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라도 이유를 남겨야 한다고. 적어도 ‘미안해’ 라는 말 뒤로 숨지 말고, 끝내지는 말아야 한다고. 연인 관계에서는 설명이 책임이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 하는게 진정한 성숙한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연인 사이라면 나는 절대 ‘미안해’라는 말 뒤로 숨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는 약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내 신념과 다른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떤 사정을 꺼내는 순간, 상대는 그 사정 속에서 희망을 찾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 책임의 무거움을 제거해 버린, 가장 쉬운 회피의 말로 상황을 닫아버렸다. “미안합니다.”
여기서 제목의 경계가 생긴다. 나는 의도없는 친절이었는데, 상대에게는 다정함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처리했을 뿐인데, 그걸 '친절'로 해석했다. 내게는 효율이었는데, 상대에게는 배려였다. 내게는 침묵이었는데, 상대에게는 확신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내가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이었다면, 추운 새벽 집에 가서 잠이나 잤을지 모를 일이다.
내 의중이야 어찌됐든 친절이 다정함으로 번역되는 순간, 관계는 한 발 앞서가 버린다.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게 된다.
굳이 따지자면 내게 다정함은 대체로 말에, 친절은 대체로 행동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문제는 그 둘이 자주 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는 점이다. 내가 건넨 건 친절 아닌 친절이었는데, 상대가 받은 건 다정함일 때, 관계는 사실보다 먼저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의미는 언제나 사람을 앞질러 간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친절을 더 조심스럽게 꺼내 들 생각이다. 덜 주려는 게 아니라, 덜 오해받기 위해서다. 필요한 만큼만, 그리고 가능하면 말로 한 번 더 정리하면서.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고 싶지도 않고, 설령 흔들었어도 “미안해”로 닫아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다정함과 친절함의 경계는 여전히 흐리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경계 앞에서 멈춰 서는 법을 배워갈 것이다.
"그냥 내가 하는게 편해서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