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잡힌 삶을 위하여
타인은 나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나의 대상이다.
생각이 지금처럼 둔하지 않던 시절에 적어둔 노트에서 이 문장을 다시 만났다.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조용히 꺼내 읽었던 기억이 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꾸만 내부가 아닌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나를 붙잡기 위해서였다.
기준이라는 건 생각보다 잔인하다. 기준은 비교를 부르고, 비교는 모르게 마음을 삭게 만든다. 처음에는 ‘자극’처럼 느껴진다. 더 잘하고 싶고, 더 나아지고 싶고, 더 멀리 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자극은 채찍이 된다. 나는 계속 달리는데 마음은 계속 다친다.
주변을 보면 기준 때문에 마음이 병든 사람들이 많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꽤 오랫동안 그 병을 앓아왔다. 오늘의 나 역시 그 병에 대해 완치라기보다, 스스로를 돌보며 약을 먹고 있는 중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그게 ‘타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타인은 한 사람의 얼굴일 수도 있고, 사회가 만들어낸 성취의 이미지일 수도 있고, 내가 나를 채점하게 만드는 이상향일 수도 있다. 형태는 달라도 공통점은 같다. 그것들은 내 안에서 자라난 게 아니라, 내 밖에서 흘러 들어온 것이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참고’였다가, 어느 순간 ‘정답’이 된다. 남들이 멋있다고 하는 삶이 내가 살아야 할 삶이 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이 내가 되어야 할 사람이 된다. 그렇게 외부의 기준이 내 안으로 들어오면, 어느 날부터는 그게 내 목소리처럼 들린다.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해.”
“너는 이 정도는 해야 해.”
내 안에서 나온 소리인데, 이상하게 낯선 소리처럼 들린다.
이상은 특히 더 무섭다. 이상은 겉보기에 ‘나’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착각한다. “이건 내 꿈이야.” “이건 내가 원한 거야.” 그런데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이상의 뿌리에는 누군가의 시선과 흔적이 있다. 누군가의 성공담이 있고, 누군가의 칭찬이 있고, 누군가의 비교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자라왔다. 그러니 이상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고 믿게 되니까. 마치 그것이 “더 강해지기 위한 과정”인 것처럼.
나는 그래서 일부러 ‘외부’라고 말하지 않고 ‘타인’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 모든 기준의 끝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기준도 사람이 만들었고, 사람들이 대중화시켰다. 우리가 멋지다고 믿게 된 가치들도 어떤 사람이 정했고, 사람들이 손뼉 쳤다.
아무 입력도 없었다면 우리는 본능을 해결하는 만큼만 살았을지도 모른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위험하면 피하고. 그런데 인간은 그 이상을 산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을 품는 존재다. 그 질문은 고귀하지만, 동시에 아프다. 특히 그 질문이 타인의 채점표를 들고 올 때는 더 그렇다.
타인이 기준이 되는 순간, 마음은 자주 무력감에 빠진다. 비교는 늘 “나보다 더 나은 누군가”를 전제로 한다. 그 전제가 쌓이면 내 삶은 성취가 아니라 미달 판정의 연속이 된다. 아무리 해도 부족하고, 아무리 애써도 모자란 사람 같아진다. 그러면 마음은 점점 말수가 줄어든다.
“어차피 안 돼.”
“의미 없어.”
“나 같은 게 뭘.”
이건 게으름이 아니라 자기 효능감이 무너지는 소리다.
버티면 버틸수록 선명해지는 감정이 있다. “나는 어차피 안 돼.”라는 상실감. 그 감정이 너무 괴로워서 사람은 움직이지 않게 된다. 하고 싶은 것도 줄고, 할 수 있는 것도 줄고, 결국 삶의 반경이 가난해진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의욕이 가난해지고 선택지가 가난해지는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한다.
“원래 사회가 그래.”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여기까지가 내 한계야.”
이 말들은 처음엔 방어막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감옥이 된다. 자기 합리화가 진리처럼 굳어가는 동안에도 마음은 계속 경보를 울린다. 공허함이라는 비상경보. 우리는 그 소리를 잠깐이라도 끄기 위해 즉각적인 보상을 찾는다. 짧고 강한 자극, 빠른 만족, 쉽게 얻는 도파민.
잠깐은 괜찮아진다. 하지만 잠깐뿐이다.
그래서 타인이 기준이 되는 건 위험하다. 무엇보다 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라는 걸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기준이 잘못되면, 열심히 살수록 마음이 더 다친다. 그게 제일 잔인하다.
그렇다고 타인을 무시하고 내 멋대로 살자는 말은 아니다. 필요한 건 타인을 바라보는 프레임의 전환이다. 타인에 대한 내 판단이 일그러질 때 우리는 아프게 된다.
하지만 타인을 ‘옆에 존재하는 현실과 사실’로 보기 시작하면, 타인은 무시의 대상이 아니다. 현실과 사실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있다, 없다만 존재한다.
타인은 내가 숨 쉬는 세계다. 내가 길을 걷고 일을 하고 웃고 실수하고 다시 일어서는 곳에는 늘 사람이 있다. 문제는 타인이 아니라, 타인을 ‘기준’으로 삼는 관점이다.
관점을 바꾸면 삶의 결이 달라진다. 타인을 기준으로 두면 나는 끝없이 평가받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타인을 기여의 대상으로 바라보면, 성장의 목적이 달라진다. 변화는 작아 보이지만, 사람을 살린다.
개인적으로는 이 지점에서 많은 생각의 전환점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공부를 하는 이유가 “나의 탁월함을 위해서”에서 “더 정확한 도움을 주기 위해서”로 바뀐다.
돈을 버는 이유가 “나만 편해지기 위해서”에서 “누군가에게 편안함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정당하게 받기 위해서”로 바뀐다.
악기를 배우는 이유가 “멋있어 보이기 위해서”에서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숨을 놓아주기 위해서”로 바뀐다.
독서를 하는 이유가 “생각의 퀄리티를 올리기 위해서”에서 “내가 가진 언어로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로 바뀐다.
나는 오랫동안 ‘나를 위한 노력’만이 정답인 줄 알았다. 더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 공부했고, 내 편안함을 위해 돈을 벌었고, 내가 멋있어지기 위해 연습했고, 내가 똑똑해지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만을 위해 달리는 성장은, 성과가 없을 때 나를 너무 쉽게 부숴버린다는 걸. 내가 나를 채점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 나는 내 편이 아니라 내 심판이 된다. 그때부터 나는 점점 예민해지고, 점점 고립되고, 점점 사랑을 잃어간다.
‘성장’이란 이름으로 나는 나를 더 좁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변화를 걸어보려 한다. 주체성을 잃지 않되, 이기적으로 살지 않겠다. 나만을 위해 살지 않겠다. 타인을 나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기여할 대상으로 두겠다.
여기서부터 성장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성장은 남보다 위에 서기 위한 사다리가 아니라, 내가 가진 능력과 성실함으로 누군가의 삶에 실제로 닿는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내 성장도 덜 흔들리고 더 단단해진다.
다만 기여는 ‘자기 소진’이 되지 않을 때에만 사람을 살린다. 나를 불태우는 친절이 아니라, 내가 지속할 수 있는 책임이어야 한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시작할 때, 자기 자신도 조금씩 살아난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아주 작은 약속 세 가지를 남긴다. 거창하지 않아서 좋다.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좋다. 무엇보다 나를 살릴 것 같아서 좋다.
비교가 올라오는 순간, 질문을 바꾼다.
“나는 오늘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성장의 목표를 ‘증명’이 아니라 ‘제공’으로 둔다.
실력은 과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닿을 때 의미가 생긴다.
타인을 기준으로 삼지 않되, 무관심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타인은 나를 평가하는 심판이 아니라, 내가 함께 살아갈 세계다.
타인은 나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타인은 내가 마음을 쓰고, 시간을 들이고, 책임 있게 무언가를 건네며 살아갈 나의 대상이다.
비교가 나를 갉아먹는다면, 타인을 향한 작은 기여는 나를 살린다.
나는 그 방향으로, 조금 더 오래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