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머(Drummer), 드리머(Dreamer)
두 번째로 간 수업에서 선생님은 갑자기 '필 인'이라는 제목이 쓰여있는 악보를 한 장 주셨다. 필인? 영어로는 '채워 넣다'라는 뜻이다. 이미 악보는 꽉꽉 채워져 있는데 무슨 뜻일까.
어떤 노래이건 정해진 박자에 따른 기본 리듬이 있다. 그 기본 리듬만으로 한 곡 전체를 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예를 들어 4/4박자인 노래가 있다면 쿵치따치만 내내 쳐도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드럼을 노래를 구성하는 악기가 아니라 메트로놈으로 보는 것과 다름없다. 드럼이 멜로디 악기만큼이나 중요한 이유는 바로 사이사이를 아름답게 메꿔주는 필인 때문이다.
드럼 필은 음악적 구절 사이의 틈을 메우는 짧은 드럼 솔로와 같이 노래의 파트 사이의 짧고 즉흥적인 전환이다. 드럼 필은 드럼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연습을 통해 쉽게 숙달할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필인을 드럼 필(Drum fills)이라고 부른다.)
필인은 쉽게 말하면 애드리브, 즉 '즉흥적으로 채우는 소리'이다. 노래나 연기에서 애드리브를 할 때는 언제인가? 정해져 있는 내용 이외에 추가적으로 분위기나 상황을 살리고 싶은 때이다. 필인 역시 노래가 전환되는 부분에서 느낌을 살려주기 위해 사용된다.
애드리브나 필인을 하려면 기본기부터 탄탄하게 갖추어야 한다. 방송의 고수 유재석처럼 기본 실력이 안정적인 사람들은 점점 애드리브에 필요한 여유와 순발력을 갖게 된다. 드럼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평생 친구 메트로놈(...)과 함께 기본박을 실수 없이 치는 법부터 연습한다. 박자 맞추기에 쫓기는 단계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필인을 배우고, 또 적용하게 된다.
하지만 애드리브와 필인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모르파티 가사에 빗대어보면, 필인은 필수 애드리브는 선택이다. 애드리브는 대본에 없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하지 않아도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필인은 악보에 써 있다. 즉, 필인까지 해 내는 것이 드러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결국 필인은 즉흥적인 척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다 계획이 있었다.
초보 입장에서는 필인이 어렵고 당황스럽게 느껴지지만 안심해도 된다. 애드리브의 경우 거의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지만, 필인은 기존의 많은 자료들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초보가 필인을 배우는 방법 2가지를 알아보자.
1. 연습곡 악보에 있는 필인 그대로 연습하기
드럼 초보가 곡 연습을 할 때는 악보가 필요하다. 이때 무작정 멋있어보이는 곡만 찾지 말고, 쉬운 곡부터 차근차근 연습해 보자. 쉬운 곡은 필인도 쉽다. 필인이 쉬운지 어려운지 모르겠다면, 4/4박자 곡에서 필인에 8분음표만 있으면 쉬운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16분음표 또는 6연음이 나온다? 다음을 기약하자.)
이 방법의 장점은 음악을 들으면서 하기 때문에 반복해서 연습하더라도 지루하지 않고, 필인이 곡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몸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필인만 반복해서 연습하기
유튜브에 '드럼 필인'이라고 검색하면 난이도별로 다양한 필인 연습 영상들이 나온다. 특히 초보를 위해서 전형적이고 간단한 필인을 소개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습을 통해 초보도 필인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 구글에 검색하면 악보 형식으로 정리된 자료도 많으니 조금만 시간을 들여 찾아 보자.
이 방법의 장점은 내 마음에 드는 필인을 선택적으로 익힐 수 있고, 추후 다양한 음악에서 응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필인을 접한 건 겨우 두 번째 수업에서였다. 센터 수업은 일대다 수업이었기 때문에 학생들마다 진도가 달라 힘들었던 선생님은 어떻게든 한꺼번에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 같다. 나는 그냥 말하는 감자였기 때문에 가르쳐주시니까 배우긴 했지만, 원래는 기본박 연습부터 착실히 한 후에 해야 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필인을 처음 접했을 땐 일단 R(오른손)과 L(왼손) 구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친절한 악보에는 쓰여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음표만 있어서 알아서 맞는 손 찾아 쳐야 한다. 게다가 아직 음표를 봐도 스네어인지 탐원인지 헷갈릴 정도로 악보 자체에 익숙하지 않을 때였다. 결국 손은 허공에 멈춘 채로 악보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박자를 놓쳐 버렸다.
이러니 기본박 잘 치다가도 필인이 다가오면 평정심이 도망가버리는 것이다. 신경을 쓰다 보니 자꾸 이전 스텝부터 꼬여 버려 정작 필인은 들어가지도 못했다. 역시 기본박 연습부터 몸에 익을때까지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