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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의 소리를 듣는 방법

드러머(Drummer), 드리머(Dreamer)

by 만세

드럼을 위한 드럼 연습


드럼을 위한 드럼 연습이란 무엇일까? 드럼 본연의 소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드럼 혼자서는 찾을 수 없다. 누군가 두드려주기 전에는 자신에게 어떤 소리가 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악기와 어울릴 수 있는지, 어떤 악기를 돋보이게 해 주고 어떤 배경에서 돋보일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드럼은 일단 자신의 소리부터 들어야 한다. 어떤 소리들이 날 수 있고 그중 가장 나다운 소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드럼 연습을 한다.


그러나 연습실의 드럼에게는 옷이 있다. 연습실에 이미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습실의 드럼에는 모두 소음 방지 패드가 있다. 그래서 나는 센터에서 드럼 연습을 하는 내내 드럼 본연의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했다.


이를 깨닫고 나니 드럼 연습 자체에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드럼을 위한 드럼 연습을 하지 않을까?



드럼에게도 옷이 있다


인간에게 옷이 갖는 의미처럼 드럼에게 소음 방지 패드란 여러 의미를 가진다.


먼저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 요소 중 하나로 신체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연습실의 드럼은 연습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공공재이다. 공공재는 마치 행인들처럼 취급된다. 아무도 그를 자기 것처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를 정기적으로 들여다보고, 안부를 묻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공재는 금방 망가지기 쉽다.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나중으로 미뤄둔다.) 아무튼 드럼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드럼을 보호하기 위한 의미가 있다.


다음으로 외부의 목적을 위한 적합한 수단으로써의 선택이다. 옷에게 외부의 목적이란 흔히 TPO로 설명되는 것, 즉 시간, 공간, 상황이다. 그렇다면 연습실 드럼의 TPO를 생각해 보자. 연습실 이용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는 연습실 밖을 벗어나지 않을 테니 연습 이외에 쓰일 일이 없다. 시간, 상황에 변화가 없기 때문에 공간만을 고려하면 된다. 연습실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건물은 많은 이가 사용한다. 공동 공간의 목적은 모두가 불편 없이 이용하는 것이다. 그 수단으로 드럼은 옷을 입는다. 자신의 소리가 타인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타인과의 구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 동일한 TPO 속에서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옷의 선택지는 무궁무진하지만 드럼에게 선택지는 옷을 입거나, 벗거나 두 가지밖에 없다. 드럼이나 인간이나 벗는 쪽이 가장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겠지만 드럼이 옷을 입음으로써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자신이 연습용이라는 사실이다. 유니폼처럼, 나의 신분을 타인에게 알리는 동시에 나에게 알려 주는 것. 내가 있는 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더 나은 옷을 입기 위해 중요하다.



처음으로 듣게 된 드럼의 소리


후에 드럼 학원에 등록하고, 학원 연습실을 이용하게 되면서 '옷이 없는' 드럼을 처음 만났다. 좁은 개인 방음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늠름한 모습은 가리는 게 없어 더욱 멋져 보였다. 그렇다면 소리는 어떨까. 조심스럽게 스틱을 들었다.


일단 정말 컸다. 고막이 얼얼해지는 기분이었다. 심벌은 그렇다 쳐도 스네어 소리가 이렇게 커? 이 정도일 줄 몰랐기에 당황했다. (소음 방지 패드... 효과가 좋은 걸지도.) 그래도 다행인 건 덕분에 자기객관화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내는 소리가 소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패드가 없으니 치는 부분에 따른 소리의 차이가 훨씬 민감하게 느껴졌다. 아직 스냅이 일정하지 않아 스틱이 심벌 가운데를 치기도 하고 끝에 맞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소리가 다 달랐다. 문제는 같은 마디를 치는데도 소리가 일정하지 않아 치는 나조차 불안하게 들렸다. 같은 부분을 일정한 세기로 쳐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더욱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스네어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내면서 듣는 것


자신이 내는 소리를 밖에서 나는 소리처럼 듣기란 힘들다. 다른 이가 내는 소리는 소음 같아 얼굴이 찌푸려져도 내가 내는 소리는 그렇게 신경 쓰이지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낯설게 듣는 일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재채기가 나오는 것처럼 친구와 대화를 할 때도, 학생들에게 수업을 할 때도 하고 싶은 말은 불쑥 튀어나온다. 이처럼 남이 듣기에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꼭 말이나 재채기처럼 내가 내는 소리가 아닐 때도 마찬가지다. 볼펜을 딸각거리는 소리, 신발을 끄는 소리도 이상하게 내 귀에는 거슬리지 않는다. 심지어는 드럼 소리마저 그렇다. 아직 잘 치는 법도 몰라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소리의 반의 반의 반도 못 미치는 소음이지만,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기쁜 초보는 자신이 '연주'를 한다고 느낀다.


이렇듯 나를 듣는 것은 거울을 보는 것과도 같아서, 같은 자극(소리)도 실시간으로 왜곡되어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공용 도서관 같은 곳에서는 이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소리를 내는 나의 의도라는 것은 소리가 남과 동시에 소리와 함께 흩어져버릴 뿐이다. 의도나 사정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누군가가 듣는 나의 소리는 낯선 소음일 뿐이므로 나는 그것이 최대한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듣기 좋지는 않을지 몰라도 들으면서 화가 나지 않도록 염두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스스로가 내는 소리를 잘 들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게다가 애초부터 남에게 들리게 할 목적으로 내는 소리라면 더욱 철저해야 한다. 끊임없이 나를 낯설게 들어야 한다. 나와 가장 적대하는 이의 귀를 가져야 한다. 좋은 소리만 들려주고 싶다면 분명 그래야 한다.



타인을 위해 타인의 소리를 듣는 것


쳇 베이커의 'My Funny Valentine'을 듣다 보면 그가 청중이나 혹은 불러주고자 하는 이에게 완벽한 노래를 선사하고자 하는 마음 같은 건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여유만만하고 솔직한 노래를 듣는 동안 우리는 그의 편안함에 동화된다. 그는 자신의 노래 실력보다 진심을 전달하는데에 집중한다. 듣는 이가 불편할까, 그래서 자리를 떠나 버릴까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내가 내는 소리를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내가 소리를 낼 수 있음 자체에 감사해야 한다. 담아낼 그릇보다 그 안의 요리가 중요한 것처럼, 나의 마음에 집중해야 한다.


타인의 소리 역시 그렇다. 타인의 소리를 가끔은 나의 소리처럼 듣는다. 그 마음속에 들어가고자 하면 소리는 더 이상 밖에서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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