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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만소 Dec 04. 2022

[10] 겸손한 멜론빵

 멜론빵 드셔 본 적 있나요? 가끔 한국에서도 판다는데 저는 한국에서 본 적은 없고 일본 편의점에 와서야 길가다 눈에 채일 정도로 많이 본 빵이에요. 멜론맛이 날 것만 같은 이 빵은 사실 멜론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아니 그럼 왜 멜론빵이야? 하실 텐데, 빵 위에 쿠키 반죽을 올려 칼로 쓱쓱 칼집을 내어 멜론 모양처럼 생기게 만들었기 때문에 멜론빵이래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멜론처럼 생기지 않아도 쿠키 반죽만 올려 구우면 다 멜론빵이 돼요. 제 표지에 있는 사진도 멜론빵이랍니다. 얼핏 보면 곰보빵 같죠? 맞아요. 소보로 빵이랑 정말 똑같은 맛이 나요. 심지어 제조 방법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 사실상 일본의 곰보빵인 것이죠.


 가격도 정말 저렴해요. 150엔 선에 파니까요. 조그마한 경단 세 개가 200엔인 나라에서 150엔짜리 빵은 정말 혜자죠. 이름만 들으면 비싼 유바리 멜론이 들어가 있을 것 같은 빵이 사실 이렇게 겸손한 빵이에요.


 일본에 오고, 일을 시작하며, 한동안 아침을 차려 먹다가 일이 바빠지기 시작하니까 아침을 차릴 시간이 없어지더라고요. 대신 매일 출근길에 빵을 사서 음료랑 마시는데, 처음에는 프랑스 국기가 그려진 마들렌이나 먹었어요. 멜론빵이 잔뜩 쌓여있어도 쳐다도 안 봤어요. 멜론처럼 단 음식은 아침부터 먹기 참 힘들었기 때문이에요. 


 일본 대표적인 편의점인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 로손은 각각 다른 형태의 멜론빵을 파는데, 회사에 가는 길에 있는 편의점은 패밀리 마트였기 때문에, 설탕이 위에 솔솔 뿌려진 각진 멜론빵을 팔아요. 심지어 크기도 커요. 달고, 맛도 없고 크기만 한 멜론빵보다는 그냥 화려한 마들렌이 낫다! 이러면서 먹지 않았어요. 


 멜론빵을 사 먹은 건 정말 우연이었는데, 어쩐지 단 것이 먹고 싶어 졌고 타이야키(한국의 붕어빵)를 먹으러 갔는데 마침 휴무였고, 그렇게 들른 편의점에서 아무거나 집은 것이 멜론빵이었거든요. 한 입 먹고 난 후 소감은 맛있다! 였어요.


 곰보빵 보다 조금 더 달고 고소하고 바삭바삭한 식감이 절로 우유를 찾게 해 주더라고요? 가끔 저희는 겉모습이나 이름, 외형에 휘둘려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곤 하는데 정말 이 상황에 맞는 표현이었어요. 이 자식 못생긴 외형 때문에 겸손한 줄 알았더니만, 사실은 진짜 맛돌이었잖아? 라면서 그날 이후로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먹기 시작했어요.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로 넘어가는데, 저는 29년 동안 자기 잘난 맛에 살았어요. 작년 이맘때쯤, 저를 좋아했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연락을 하니까 저보고 많이 변했대요. 제가 어떻게 변했냐 묻자, 인류애가 생긴 것 같대요. 그러면서 겸손해졌대요. 그 애는, 이 세상에서 제일 지가 잘난 줄 알고 있던 저를 좋아했었는데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다네요.


 그때부터 쭉 생각해봤는데, 확실히 겸손해졌어요. 아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4개 국어에 능통하고 1개 국어를 버벅거리면서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름 괜찮은 대학을 나왔고, 남들보다 잘하는 스포츠가 있죠. 그렇게 작지 않은 키, 못생기지 않은 평범 이상의 얼굴, 말발, 아는 것이 많고, 글을 쓰는 능력, 경험, 돌아가는 잔머리, 많은 연애, 부족하지 않은 월급, 부족하지 않은 집안. 모두 저를 형성하는 단어였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에서는 재수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죠.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더라고요. 모든 분야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있고 어느 하나 내가 1등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천재들을 현장에서 보고, 일에서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해내는 사람들을 보니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느꼈죠.


 일본에 와서 겸손한 일 년을 살았어요. 많은 것을 가리기 시작했어요. 한 마디로 맛을 가린 거죠. 기껏 상대에게 드러나는 것은 내 외형 정도였어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멜론빵처럼요. 상대를 배려하는 말투를 배우고 상대를 배려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죠.


 어린 사람에게도 존댓말을 잊지 않았고 그 사람도 나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다 보니 성격이 많이 달라졌어요. 어느 정도냐면, 누가 저에게 맞춤법이 틀린 문장을 보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정도라니까요!?


 많은 사람들은 제 장점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저 신중하다. 열심이다. 조금 츤츤거린다. 정도의 평가였어요. 그러나 저를 곁에 두는 사람들은 제가 숨겨도 제 진가를 알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그 모습들을 안다는 것을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이런 글도 사실 제 자랑이긴 한데, 요즘 많이 느끼는 것이라 써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서른이 된 지금에서야 느낄 수 있었죠. 장점은 숨기면 숨길수록 상대에게 더 맛있는 무언가가 되겠구나. 상대가 외형으로 저를 평가할지 몰라도,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진짜 좋은 사람에게는 더 맛있게 나라는 사람을 대접할 수 있겠구나. 하면서요.


 요즘 이틀에 한 번 매론빵을 먹는다고 했죠? 저는 겸손에 중독됐어요. 달고, 고소한 겸손이죠. 더 이상 제 잘난 척에 재수 없어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 정말 좋은 요즘입니다.


 '컴포트 존 멀리하기.' 제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매일을 적응해 나가는 요즘입니다. 30대가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그 첫해가 마무리됐어요. 이룬 것도 많고 달라진 것도 많은 30대의 첫걸음인데, 그동안 제 사람들에게 저는 어떻게 비쳤을까요? 많이 겸손해졌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재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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