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요. 승희 씨. 정원 씨랑 빛나래 씨도 오늘 일찍 와서 마침 애프터눈 티 내릴 참이었어요."
중국어를 전공했고 우연히 차(茶) 박람회에서 선생님을 만나 수업을 듣게 되었다는 빛나래님.
친구를 통해 차를 처음 접하고 그 매력에 빠지게 되어, 지하철로 한 시간 반 걸리는 용인에서 아침에 네 살 아이를 등원시키고 수업을 들으러 온다는 정원님.
결혼한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디저트와 차에 관심이 많아서 배우게 되었다는 정은님.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함께 차(茶)를 배운다.
학연, 지연, 친구도 아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는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여러분들 다들 수업시간보다 조금 일찍 와요. 그럼 이렇게 수업 때 안 마셔보는 차도 접해보고. 좋잖아요? 이건 '아포 홍차'예요. 아포는 새싹들이 포개져있는 걸 뜻해요. 자 마셔봐요."
선생님은 아포홍차를 시작으로 중국의 민북오룡차인 육계를 내어주셨다.
2015 야생 아포 홍차
죽기 전에 세상의 모든 차를 다 마셔보고 죽을 수나 있을까. 이 좋은 차들을 이제야 이렇게 접하다니. 아빠가 만든 차를 30년 동안 함께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나의 차생활. 어쩌면 만수가 만든 차만 마셔온 나는, 모든 차를 마실 때의 기준을 만수 차로 세웠는지도 모른다. 미각이 길들여진 걸까.
선생님께서 차를 시작한 이상, 좋은 차만 마시라고 하셨다. 좋지 않은 차를 마시면 속이 쓰리고, 너무 진한 차도 몸에 좋지 않다고 한다. 평소에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차를 많이 넣고 진하게 마신 적도 많았는데.
4개의 자사호와 4개의 차
"오늘은 총 네 개의 자사호로 각각 다른 차를 우려 보도록 할게요. 청차(오룡차), 백차, 녹차, 흑차를 각각 다르게 우려 봄으로써 서로 비교도 해보고 마셔보는 시간 가집시다."
자사호는 유약을 칠하지 않은 차호로, 차의 향을 머금는 게 특징이다. 자사호 하나로 한 종류의 차만 우려 마셔야 하고 한 가지 차로 길들여질 때, 그 매력이 더욱 발산된다고 한다.
문득 이런 매력이 자사호의 강점이자 약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너무 뜨거운 온도의 물을 부으면, 달달 떨리면서 깨질 수도 있어서 미지근한 물로 잘 달래 준후 뜨거운 물로 우려 마셔야 한다.
사람은 어떨까.
자사호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자신만의 향기를 뿜어내는 사람. 조금은 고집 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 어쩌면 자사호와 나는 꽤 닮은 것 같다. 사실 나만의 향기는 아직 미완성이다. 그렇지만 내 특유의 향을 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은 백차같이 구수하고, 내일은 청차처럼 열정적으로 변하고, 모레는 흑차처럼 깊지만 부드럽고, 그다음 날은 녹차처럼 파릇파릇한 어린아이로 변하더라도. 같은 차밭에서 자라는 같은 차임을, 나는 알고 있다.
100도씨의 뜨거운 물에 견디기 힘들어하는 자사호처럼 나의 인생도 누군가로부터, 무엇으로부터 견디기 힘들 때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