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만사人事萬史
논공행상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공을 논하고 상을 준다는 의미다. 이는 삼국지 오서 고담전에 나온 표현이다.
논공행상이란 말의 유래는 이렇다. 241년, 오나라 황제 손권은 네 방향으로 위나라를 침공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전장은 회남의 작피였다. 이 전장에는 손권의 사위이자 당시 군부의 핵심 인물인 전종이 나섰다. 그러나 그는 위나라 장수 왕릉과의 결전에서 승기를 잡지 못했고, 결국 위나라의 원군이 도착하자 크게 패하며 10명의 장수를 잃었다.
이때 장휴와 고승(고담의 아우)은 수춘에서 위군과 싸우다가 작피로 구원을 가 위나라 군을 저지했다. 이를 듣고 전종의 아들 전서와 조카 전서는 공을 세우겠다는 마음에 퇴각하던 위군에 반격을 가했다. 그 결과 왕릉이 이끌던 위나라 군은 패주하게 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 오나라 수도 건업에서는 전투에 참가한 장수들의 공적을 평가해 상을 줬는데, 공적의 경중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고담전에서는 이를 "논공행상 각유차(論功行賞 各有差)"라 표현했다. 여기서 논공행상이란 말이 비롯되었다.
그런데 위나라 군을 저지한 공을 '갑', 반격한 공을 '을'로 분류했다. 이에 따라 고승과 장휴는 정장군(투스타) 칭호를, 전서 두 명은 편장(원스타) 칭호를 받았다. 이로 인해 전종과 그의 혈족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반격해 적을 패주시킨 자신들의 공이 더 큰데, 공적 평가에서 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손권의 아들 손패를 통해 손권에게 불만을 제기하며, 고승과 장휴의 공적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손권은 충분한 조사 없이 장휴를 체포했고, 고승의 형 고담에게 사죄를 요구했다. 그러나 고담은 사죄할 의사가 없었고, 손권과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고담과 고승은 지방으로 좌천되었고, 고담은 유배지에서 2년 만에 사망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논공행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담과 고승은 오나라의 태자 손등을 모셨던 태자 사우였으며, 이들은 태자 손화와 친분이 있었다. 반면 손권은 손패를 총애했는데, 전종 일족이 손패를 통해 상신한 것은 이 갈등의 연장선이었다.
이 논공행상 문제는 결국 오나라의 내부 갈등을 심화시키며, 이궁의 변이라는 정치 다툼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오나라 명장 육손은 홧병으로 죽고, 고담, 고승, 장휴 등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손패도 자결했고, 태자 손화는 유배 끝에 죽음을 맞았다. 이후 오나라는 정변과 혼란 속에서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조직에는 파벌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파벌 간 갈등은 논공행상 같은 일에서 쉽게 드러난다. 특정 파벌에 공과 상이 집중되고 다른 파벌은 상대적으로 소외될 경우, 불만이 폭발할 가능성이 크다. 공적을 평가하고 상을 주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조직의 공적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성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상을 고르게 나눌 필요가 있다. 모두가 공감할 수 없는 공적 평가라면 불만을 살 수밖에 없다.
조직에서 상을 줄 때는 가능한 다양한 상을 주는 것이 좋다. 파벌을 골고루 챙기고, 특정 직원에게 특별한 보상을 하고 싶다면 조용히 면담을 통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연봉 협상에서 반영하는 것이 현명하다. 조직 내부의 흐름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 내부 갈등이 조직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
논공행상은 인사 관리의 기본이지만,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