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반 치

2025.04

by 유영준


딱 한 치, 아니 반 치.

바람이 조금 더 불었다면, 아니 덜 불었다면
이렇게 궁벽진 틈에 붙어 뿌리를 내릴 일은 없었겠지.

그래도 어쩌겠니, 여기서 발 붙고 살아야지. 하는 찰나에
날 비웃는 듯 새촘히 고개를 더 들이민다.

여기면 어떻고 저기면 어때. 그냥 내가 여기에 뿌리를 내린걸.
뿌리조차 못내리고 말라붙은 내 친구들이 수십만인걸.

한 톨 먼지 위에서까지 뿌리를 내리는 치열함에
그래도 사람사는 세상은 이보단 훨씬 낫겠다 싶다가도.

모두 파란하늘 보며 당당히 뿌리내리고 싶었겠지.
그래도 내가 자리잡은 곳이 그저 너른 벌이 아니라 틈이라면
내가 꽃을 틔우고 한 치 앞, 저 건너로 내 자식 실어보내면 되지,
라는 그 생존의 집념이 들린다.

내 조부모와 부모와 선배들은 이보다 더 작은 틈, 더 적은 먼지 속에서도
뿌리 내리고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겠지.

먼지 하나 없이 파란 하늘이 오늘 참 많이도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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