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만사人事萬史
25년 전, 큰 화제를 몰고 탄생한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태조왕건'인데요, 그 전까지 생소했던 후삼국 시대의 역사를 재조명한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유튜브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 태조왕건 속 주인 공 3명을 통해 오랜만에 인사만사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태조왕건에는 왕건과 궁예, 견훤이 중심축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드라마기 때문에 극화한 것이 많으나 어느정도 사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재해석입니다. 사실 한 인물마다 몇 번의 챕터를 쓸 정도이지만 오늘은 간단히 태조왕건 속 주인공들을 가볍게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후삼국의 패권에 도전한 사람은 견훤이었습니다. 그러나 견훤은 스스로의 능력과 성과에 대한 지나친 확신으로 인해 타인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였고, 결국 자신이 만든 질서 속에서 무너졌습니다. 궁예는 옛 고구려땅을 기반으로 일어서 한반도의 대부분을 석권하였습니다. 빠른 성과에 만족했던 것일까요? 궁예는 자신을 미륵으로 자처하며 신격화하려 했으나, 비현실적인 자기 이미지에 몰입한 나머지 백성의 신뢰를 잃고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왕건은 겉으로는 허리를 굽혔으나 내면의 원칙과 신념은 결코 굽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보다 부족한 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이른바 ‘형님영업’을 통해 관계를 엮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궁예의 부하들이 왕건을 추대하게 만들었고, 견훤은 자신의 아들에게 쫓겨난 후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버리고 왕건에게 귀부하여 역사적 패배를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왕건의 승리가 그의 완벽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단히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위기와 타인의 실패를 관찰하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조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견훤의 결단력에서 장점을 배웠고, 궁예의 권위주의로부터 치명적인 리더십 오류를 통찰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인물의 공통적인 실패, 즉 사람을 잃는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결코 그 길을 밟지 않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 글은 이들 세 지도자의 인사철학과 그에 따른 조직 운영의 성패를 비교함으로써, 현대 조직이 취해야 할 인사경영의 방향성을 고찰하고자 합니다.
견훤은 전형적인 카리스마적 창업형 리더로, 자신의 무력과 전장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후백제를 창건한 인물입니다. 그는 전략적 판단과 전술적 민첩성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으며, 초기의 영토 확장과 정치적 주도권 장악에서도 그 실력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사철학은 철저히 능력 중심적이었으며, 구성원 간의 관계성과 감정적 유대는 후순위에 밀려 있었습니다. 조직 내에서는 상명하복의 군사문화가 뿌리내렸으며, 구성원 간의 수평적 소통이나 자율성은 철저히 억제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단기적 효율성은 높일 수 있었지만, 장기적인 조직 응집력과 지속가능한 리더십 확보에는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혈연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권력의 위협 요소로 인식하였고, 아들인 신검과의 관계마저 불신 속에서 파열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인사정책은 권위의 집중과 신뢰의 해체라는 구조적 문제를 낳았고,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만든 체제에 의해 배제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견훤의 실패는 현대 경영환경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조직의 성과를 강조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인간 중심의 조직문화가 결여된 성과주의는 결과적으로 조직의 지속 가능성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리더는 구성원을 자원(resource)이 아닌 관계자(stakeholder)로 인식해야 하며, 인간적인 존중이 기반되지 않은 인사는 결코 장기적 성과를 담보할 수 없습니다.
궁예는 고아로 자라나 정통성 없는 기반 위에서 태봉을 세운 지도자로,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종교적 상징과 신격화를 도입하였습니다. 그는 미륵불의 재림을 자처하며 통치 권위를 초월적 존재에 연결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비판 불용의 절대적 통치 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그의 인사운영은 오로지 ‘충성’과 ‘복종’을 기준으로 했고, 의심이 들면 숙청하는 방식으로 측근 정치를 강화했습니다. 신하들은 전문성과 역량보다는 ‘복종 여부’로 평가되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직책에서 리더십의 공백이 발생하였습니다. 왕건조차 처음에는 궁예의 부하였으나, 그의 무분별한 숙청과 전횡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장수들과 함께 궁예를 폐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궁예의 사례는 권력 집중이 가져올 수 있는 인사 실패의 전형적인 모델로 평가됩니다. 구성원은 단순한 명령의 수신자가 아니라, 조직의 가치를 함께 실현해 나갈 동반자입니다. 신뢰 기반의 조직은 일정 수준 이상의 자율성과 다양성, 건전한 이견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빠진 조직은 필연적으로 ‘공포의 균열’ 속에서 스스로 붕괴하게 됩니다.
왕건은 개성을 본거지로 한 해상 무역 기반의 호족 출신으로, 무력보다는 외교와 유연성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간 전략가형 리더였습니다. 그는 궁예 휘하에서 조심스럽게 정치적 역량을 키우며, 주변 호족들과도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해 갔습니다. 이른바 ‘형님영업’이라 불리는 그의 포용적 접근은 단순한 관계 구축이 아니라, 철저한 전략적 계산에 기반한 인사 철학의 일환이었습니다.
왕건은 다양한 출신 배경의 인재를 차별 없이 등용하였고 태봉 잔존세력은 물론, 후백제 및 신라의 귀족 출신들까지 포괄하는 연합 정권을 구축하였습니다. 이는 정치적 연립 구조를 넘어서, 하나의 포용 공동체로서의 조직 구조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는 고려 초기의 정치적 안정을 크게 도왔습니다. 실제로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애왕은 왕건의 사위가 되었고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는 왕건의 아들인 정종과 광종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왕건은 두 왕조의 왕들과도 혈연으로 맺어진 것이죠.
그는 ‘명령형 리더’가 아닌 ‘협력형 리더’였습니다. 타인의 의견에 귀 기울였고, 정책 결정에 있어 합의를 중시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은폐하지 않고, 반성할 줄 아는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조직 운영에서 실무진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조언을 경청하는 태도는 구성원의 몰입을 유도하며 성과 창출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조직 리더에게 필요한 자질은 왕건의 방식과 상통합니다. 다양성을 수용하며, 유연하게 의사결정을 조율할 줄 아는 포용적 리더십은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큰 시대에서 더욱 요구되는 역량입니다. 왕건은 그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고전적 이상형의 한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직은 관계로 살아간다.
견훤, 궁예, 왕건은 같은 시대에 살았으나 전혀 다른 인사 전략을 펼쳤으며, 그 결과 또한 현격하게 갈렸습니다. 이들의 사례는 오늘날 기업과 조직이 직면하는 인사 문제에 유용한 역사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성과 중심의 경영이 무조건적인 해답이 아니며, 통제 기반의 권위주의는 지속 가능한 조직 구조를 오히려 저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다양성을 포용하고, 상호 신뢰를 중심으로 한 수평적 조직문화를 구축하는 인사 전략은 위기 속에서 조직을 생존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는 핵심 자산이 됩니다.
특히 ‘사람을 남기는 리더십’이 중요한 시대에, 리더는 통제자가 아니라 촉진자(facilitator)가 되어야 합니다. 구성원의 가능성을 발굴하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인사의 본질적 기능이자 리더십의 완성입니다.
하늘이 너무 맑기만 하면 밋밋합니다. 구름이 조금 있어야 노을이 아름답듯, 리더 또한 약간의 굴절과 유연함을 가질 때 더 깊은 신뢰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견훤은 강했지만 외로웠고, 궁예는 통제했지만 고립되었습니다. 오직 왕건만이 겸손함을 무기로 삼아 사람을 얻었고, 그 힘으로 고려라는 국가를 세웠고 5백년 간 존속할 기반을 다졌습니다.
오늘날 리더에게도 이러한 통찰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위계보다 신뢰, 지시보다 공감, 평가보다 존중. 이것이 바로 인사경영의 본질이며, 지속 가능한 조직의 핵심 원리입니다.
진정한 리더는 허리를 굽힐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허리는 사람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며, 결코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리를 굽히는 자가 결국 천하를 얻게 되는 이유는, 그만큼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