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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인사만사

흰 실과 검은 실

인사만사人事萬史

by 만수당

오늘날 기업의 경영자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결정을 내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자 속에서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조직이 커질수록, 변화의 파도가 거세질수록 ‘리더의 역할’은 더욱 뚜렷해지고, 동시에 더 어렵고 복잡해집니다. 리더란 어떤 존재여야 할까요? 신하에 의존한 두 명의 고대 군주인 춘추시대의 제환공과 삼국시대 촉한의 유선을 통해 우리는 의외로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두 군주의 상반된 리더십 사례를 비교하며, 오늘날 조직 운영과 기업 경영에 있어 어떤 점을 배우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지를 길게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단순히 과거의 군주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의 리더십, 특히 위임의 방식과 주체성, 위기대응, 조직 설계라는 측면에서 제환공과 유선이 상징하는 리더십의 그림자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인재 활용 방식, 리더십 철학의 지속성, 후계자 육성 여부, 조직 문화의 형성과 같이 조직 내에서 실제적으로 고민되는 사안들과 연결하여 보다 구체적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주체 없는 리더는 시대를 이끌 수 없다

제환공은 관중이라는 명재상을 얻어 제나라를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로 이끕니다. 관중이 나라의 행정을 맡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동안, 제환공은 국가의 외교·군사 전략을 주도하며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냈습니다. 관중은 실무를 맡았지만, 나라의 철학과 방향은 제환공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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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군주로서 스스로를 낮추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관중이라는 뛰어난 재상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전면에 세우되 궁극적인 정치의 방향성과 비전은 자신이 설정했습니다. 이는 조직에서 말하는 ‘거버넌스’의 정수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경영자는 CEO라기보다는 CVO, 즉 Chief Vision Officer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증한 고대의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국가적 사안에서 내린 판단들, 예컨대 제후국과의 연맹 구축, 외교 균형 정책, 신흥세력의 성장 억제 전략 등은 단순히 관중의 작품이 아니라, 제환공이라는 리더의 철학이 녹아든 결과였습니다. 그는 ‘맡기되 잊지 않고’, ‘숨되 사라지지 않는’ 지도자의 전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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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유선은 유비의 뒤를 이어 촉한의 황제로 등극하였지만, 정치는 제갈량에게 전권을 맡기고 스스로는 중심을 세우지 못한 군주였습니다. 제갈량이 살아 있을 동안은 국가가 유지되었지만, 제갈량이 지명한 후임자인 장완과 비의가 죽은 뒤 유선은 황호, 진지와 같은 측근에 휘둘리며 촉한의 몰락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유선을 '흰 실'에 비유하며, 자신이 색을 가지기보다 염색하는 자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는 군주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유선은 제갈량을 단순한 신하로 보기보다, 아버지 유비가 남긴 ‘대리 군주’로 인식했던 듯합니다. 정무의 주도권을 넘겨주고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고, 오히려 거기에서 안정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 심리적 의존이 곧 국가 통치에 대한 무책임으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는 제갈량 사후 혼란과 몰락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리더 역시 실무의 많은 부분을 전문가에게 위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의 정체성, 존재 이유, 비전과 같은 ‘방향성’까지 타인에게 맡긴다면 조직은 리더를 잃고 흔들리게 됩니다. 주체 없는 리더는 시대를 이끌 수 없습니다. 단지 착한 사람, 화내지 않는 사람, 실수를 적게 하는 사람으로는 조직을 이끌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중심을 잃지 않는 지도자의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위임과 방임은 종이 한 장 차이


제환공은 관중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되,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함께 했습니다. 이는 위임이었습니다. 그는 업무를 관중에게 일임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위치에 서 있었고, 관중의 정치 철학을 공유하고 정당화하는 데 힘썼습니다. 즉, 단순한 '전문가 존중'이 아니라, 철저한 파트너십이었습니다.


관중이 개혁적인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환공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권한을 주되, 정치적 설득력을 뒷받침하는 최종 보증인이었습니다. 이는 현대 기업에서 CEO가 CFO나 COO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도, 그 전략과 실행을 자신이 책임지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역할의 구분’과 ‘방향의 통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유선은 제갈량에게 국정을 전적으로 일임하고,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이나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제갈량은 책임의 위탁 대상이었으며, 국정 운영의 안심장치였습니다. 그렇기에 제갈량 사후 그는 공백을 메울 의지도, 역량도, 준비도 갖추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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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경영에서 위임은 필수입니다. 리더가 모든 것을 직접 챙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위임은 신뢰와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리더가 조직의 운명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맡기기만 한다면 조직은 통제력을 잃게 됩니다. 좋은 리더는 ‘간섭하지 않되, 책임지려는 사람’입니다. 위임의 방식은 곧 조직문화로 연결되며, 상명하달의 방식이 아닌 '공동 책임과 합의 기반'의 위임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직은 결국 리더가 보여주는 ‘위임의 언어’를 닮아갑니다.



리더의 철학은 조직의 운명이다


제환공의 통치는 단순히 관중이라는 인재를 얻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 일관된 철학과 비전을 지녔고, 그것이 조직 전체에 명확히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제환공이 내세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대의는 당시 국제 정세에서 주도권을 쥐는 외교 전략이었고, 그에 따라 행동한 모든 개혁과 외교는 비전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실행이었습니다.


즉, 철학이 있었고, 그 철학을 뒷받침할 사람이 있었으며, 그 철학을 실행에 옮길 구조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조직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중심 철학이 분명해야 합니다. 리더의 철학은 곧 조직의 언어이며, 존재의 방식이며, 나아갈 방향입니다.


반면 유선에게는 철학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비가 남긴 유산, 제갈량의 신념, 그 외 부하들의 판단을 ‘채택’하긴 했지만, 스스로 사고하고 결단하는 방식으로 내면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이면서, 동시에 ‘나라를 관리해주는 사람’에게 의존하는 소비자에 가까웠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의 수장이 자신의 생각 없이 타인의 철학에 기대어 결정한다면, 그 결정은 일관되지 못하고, 조직의 정체성은 희미해지며, 구성원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리더의 철학은 반드시 구체화되어야 하며, 그 철학이 일관되게 조직의 말과 행동으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말년의 퇴락, 리더의 마지막 책임



제환공은 말년에 5명의 아들 중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 것인가를 두고 내부 권력 다툼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는 인재를 등용했던 그 치세 초기에 비해 말년에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선택을 반복하며, 무려 67일간 방 안에서 시신이 썩어갈 때까지 묻히지 못하는 비극을 맞습니다. 그것은 관중이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였고, 더 이상 그를 바로잡아줄 현명한 조언자가 곁에 없었던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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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갈량이 죽은 뒤 정국은 급격히 혼란에 빠졌고, 유선은 말년까지 술과 음악에 빠져 지내며 주변 측근들의 말만 듣다가 결국 위나라에 의해 아버지의 꿈인 촉한마저 멸망하고 맙니다.


조직의 말년, 기업의 쇠퇴기에 드러나는 리더의 민낯은 바로 '초심과 종심의 간극'에 있습니다. 초기의 결단과 의지가 유지되지 않고, 철학이 조직문화로 정착되지 않은 채 개인의 기호와 사적 이익에 함몰될 때, 리더는 몰락합니다.


이러한 교훈은 기업 후계자 육성과 조직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문제로 연결됩니다. 리더는 떠난 이후에도 남겨질 조직이 자생할 수 있도록 구조를 남겨야 하며, 스스로의 권위를 다음 세대에 온전히 이양할 수 있는 철학적 준비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제환공은 '잘 위임하되 철학을 유지한 군주', 유선은 '철학 없이 위임만 한 군주'였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리더의 철학, 위임의 방식, 후계자 준비라는 리더십의 3요소를 얼마나 갖추었는지에 따라 평가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은 분명합니다. 나는 철학을 가진 리더인가? 나는 그 철학을 일관되게 유지하며 위임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조직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제환공과 유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빛으로 조직을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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