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고 나른한 오후, 여느 때처럼 동료들이랑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오늘 주제는 ‘이상형’.
누군가는 외모를 꼽았고, 누군가는 재밌는 사람, 또 다른 누군가는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을 얘기했다. 그저 가벼운 잡담이었는데 분위기는 왠지 토론처럼 흘러갔다. 그러다 갑자기 내게 화살이 돌아왔다.
“만숑님은 이상형이 어떤 사람이에요?”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괜히 진지하게 대답해버렸다.
“음... 좀 뜬금없게 들릴 수 있는데, 에리히 프롬이라고 들어봤어요?”
“에리히... 뭐라고요?”
동료들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이미 말문을 연 김에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에리히 프롬이라고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쓴 사람인데... 보통 이상형 얘기하면 조건부터 말하잖아요. 키는 몇 이상, 성격은 이랬으면, 직장은 어디 같은. 그런데 프롬은 아예 반대로 얘기해요. 사랑은 그냥 ‘느낌’이나 ‘운명’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성숙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중요한 건 ‘좋은 사람을 찾는가’가 아니라, ‘내가 좋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이에요.”
말하면서 나 스스로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우리가 정해놓은 조건이라는 게 오래 못 간다. 처음에는 웃음이 많아서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왜 맨날 농담만 해”가 되고, 성실해서 든든했는데 나중에는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지”로 보이기도 하지 않는가. 조건은 상황에 따라 금세 다른 얼굴로 바뀐다. 결국 오래 남는 건 그 조건이 아니라, 서로가 어떤 태도로 관계를 이어가느냐인 거다.
프롬이 말한 것도 그거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빠져드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기르는 태도’라는 것. 배려, 책임, 존중, 이해... 이런 것들은 상대방이 이상형이라서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얼마나 연습해왔는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왔는지에 따라 흘러나오는 능력에 가깝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똑같다. 아무리 좋은 교재를 만나도 내가 매일 말해보지 않으면 입이 안 트이듯, 좋은 사람을 만나도 내가 성숙하지 않으면 결국 같은 문제로 부딪힐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 이상형은 정해진 조건표 같은 게 아니라, 나의 성숙함이 드러나는 거울에 더 가깝다. 내가 얼마나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내가 얼마나 배려나 존중을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는지에 따라 ‘이상형’이라는 얼굴도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내 안의 성숙함을 이끌어내지만, 또 다른 사람은 내 미숙함을 더 크게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이상형은 처음부터 주어진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에 따라 서서히 만들어지는 결과물에 가깝다는 거다.
나는 말을 정리했다.
“결국 제 이상형은, 저를 좀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들고, 제가 배려나 존중 같은 걸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더라고요.”
일동 정적.
“...아 네. 그러니까 만숑님 이상형은, 에리히 뭐라고요? 에리히 프롬?”
옆자리에서 누군가가 바로 끼어들었다.
“그래도 차은우가 낫지 않아요?”
“나는 박보검!”
그제야 알았다. 아, 이런 얘기는 혼자 마음속에만 간직해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