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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반동형성

by 만숑의 직장생활

회의실에 앉아 조용히 미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옆 팀 김 팀장이 들어섰다. 우리가 예약 없이 사용하고 있었고, 그가 예약한 공간이었나 보다.

"죄송합니다, 금방 비우겠습니다."


우리가 서둘러 일어서려는 찰나,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괜히 방해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더 필요하시면 쓰셔도 됩니다.”


공손했다. 지나치게 다정했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일이 떠올랐다. 우연히 함께 탄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혼잣말처럼 말했다.


“제가 괜히 이 엘리베이터를 탔나요? 괜히 사람들 마음 불편해지게... 다음 걸 탈 걸 그랬네요.”


그 순간에도 굳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별 뜻 없이 흘려들었었는데, 회의실 장면까지 겹치고 나니 그의 정중한 말투가 뭔가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를 오래 겪은 이들의 평은 조금 달랐다.


“회의 중엔 목소리 높여 윽박지르는 경우가 많아요. 말꼬리 잡고 면박도 주고.”

“마음에 안 드는 팀원은 노골적으로 무시하거나 험담해요.”

“회식 안 나오면 다음날 눈치 엄청 줘요. 공손한 건 말뿐이에요.”


겉으론 낮게 말하지만, 속은 높게 다그치는 사람. 겉은 공손하지만, 실은 강하게 움켜쥐는 사람.


며칠 후, 다른 팀 최 팀장과의 협업 미팅이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 그는 밝게 말했다.


“이렇게 얼굴 뵌 김에 밥 한번 꼭 모셔야겠네요.”

“오늘 회의 정리 너무 깔끔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말투 하나하나에 배려가 묻어났다. 그는 미팅 내내 상대의 수고를 먼저 언급했고, 마무리할 때도 팀원들을 챙겼다.


“일도 일이지만, 우리끼리 나중에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제가 법카는 가져가겠습니다.”

“항상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 팀이 많이 배워갑니다.”


하지만 그의 팀원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의외였다.


“진짜 본인 방식 아니면 다 틀렸다는 식이에요.”

“열심히 해도 ‘다시 해오라’ 고만하고 항상 저희를 탓하세요. 결국 책임은 우리한테만 돌아오죠.”

“말은 부드러운데, 팀원들에게는 아무 가이드 없이 무작정 해오라고만하고 밀어붙여요. 막무가내예요.”


겉으론 부드럽지만, 속은 단단히 닫혀 있는 사람. 겉은 배려하지만, 실은 아집을 밀어붙이는 사람.


심리학에선 이걸 ‘반동형성’이라고 한다.
속마음과는 반대되는 감정이나 행동을 일부러 더 과하게 드러내는 방어기제.


불안하거나 위태로울수록, 사람은 더 상냥해진다. 스스로의 날 선 면을 감추기 위해 부드러운 말과 태도를 앞세운다.


아집이 깊을수록, 사람은 더 배려하려 한다. 모두를 챙기는 듯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방식대로 이끌고 싶은 마음이 배려라는 옷을 입는다.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그 마음의 진짜 모양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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