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4화] 비스포크 전략

by 만숑의 직장생활

새로운 형태의 사업 기회를 찾는 과제였다..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고객 경험을 개선하고, 그 흐름을 비즈니스로 연결할 수 있을지를 탐색하는 프로젝트였다.


부사장 보고를 위한 ppt 슬라이드는 각자 맡은 파트를 나눠서 작성했다. 프로젝트 참여한 모든 멤버가 훌륭했지만, 그중에서도 기술영업 출신인 장이 맡은 부분은 유독 화려했고, 단어와 문장들은 반짝거렸다.


그가 작성한 슬라이드 헤드 메시지엔 란 배경과 함께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고객 인터랙션 기반의 다차원 반응형 구조를 통해 서비스의 맥락 적응성을 확보함으로써, 개인화된 선택 경험의 실시간 최적화를 실현”

(해석) 입력값에 따라 추천 내용이 달라짐


연보라색 그라데이션이 깔려 있는 다른 슬라이드에는 이 문장.


“자기 진화형 알고리즘을 적용한 서비스 적응모델을 통해, 선택이 아닌 ‘발견’을 유도하는 비즈니스 트리거를 내재화”

→ (해석) 잘 맞는 걸 추천해 줌


중간보고 때도 과장의 말은 막힘이 없었고, 빠른 템포로 술술 흘러가는 발표였다. 듣는 사람만 따라가기 바빴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건 단순한 기능이 아닙니다. 고객이 체감하는 인텔리전트 파트너 — 그게 이번 전략의 본질입니다.”


사실 이번 중간보고는 네 번째였다. 부사장한테 직접 보고를 해야 하는 상무 입장에서는 핵심이 잘 부각되지 않아 의사 결정에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피드백은 이랬다.


“좋은 내용인데... 문장 길이가 좀 길어서, 듣는 분들 입장에서 이해가 어려울 수 있을 것 같다. 조금만 보완해 보자”


두 번째 보고 때는 슬라이드에 ‘페르소나’, ‘시딩 전략’ 같은 단어가 많았다. 상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조금 더 단순하게 정리해 볼 순 없을까? 전략의 핵심이 흐려질 수도 있어서.”


세 번째 때는, 발표가 끝나고 한참 있다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걸 부사장님께 그대로 전달하긴 조금 어렵겠네... 중간에서 내가 한번 더 풀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은 늘 점잖고 부드러웠다. 그래서 완곡한 “의견” 정도로 받아들였던 것일까? 표현을 살짝 정리하긴 했지만, 핵심 방식은 그대로였다.


드디어 네 번째 보고 때, 의외로 보고는 무난하게 시작됐다. 첫 슬라이드, 두 번째 슬라이드. 말 그대로 ‘깔끔하게’ 넘어갔다. 그러다 서비스 구조 설명에서 이 과장이 입을 열었다.


“이번 전략은 고객의 니즈를 파라미터 단위로 분해하고, 그 위에 맞춤형 여정을 재구성하는 비스포크 전략입니다.”


‘비스포크’.


그 순간, 김 상무가 노트북을 닫았다. 별다른 표정 없이 팔짱을 풀고, 이마를 짚은 뒤 조용히 말했다.


“야.”


과장이 고개를 들었다.


... 씨x,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냐.”


탄식 비슷한 그 무엇. 그저 피로였다. 아주 정제된 피로. 모두가 순간 얼어붙었고 같이 배석한 서 팀장은 쓴웃음을 지으셨다. 이 장 또한 당황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바로 본인의 멘트를 정정했다.


"고객 성향에 맞춰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슬라이드는 천천히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다음 슬라이드 배경색은 민트색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13화] 반동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