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회의가 끝나고, 우리는 말없이 노트북을 덮었다. 산만했던 토론 분위기와 어지러운 자료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때 갓 1년이 넘은 신입 한 명이 조용히 옆에서 말했다.
“만숑님, 커피 한 잔 하러 가실래요?”
“좋지.”
우리는 같이 라운지로 내려갔다. 커피 머신에서 커피가 내려가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요즘은 좀 할 만해?”
내가 먼저 물었다.
“아직 정신없어요. 자료 만들 땐 뭐가 중요한지도 잘 모르겠고, 회의 들어가면 분위기 파악하는 데만 한참 걸려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가 다 내려지고, 우리는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가볍게 회사 얘기, 팀 분위기, 업무 중 생긴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 친구가 컵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근데 가끔은요... 내가 너무 늦게 시작한 건가 싶기도 해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주변 친구들은 벌써 대리 달고, 어떤 애는 대학 때부터 로스쿨 준비해서 지금 로펌 다니고 있고요. 다들 무슨 계획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자기 커리어를 잘 쌓아가는데... 저는 이것저것 하다가 이제야 취업했고,
회사도 오래 다닌 데가 없고, 뭘 하고 싶은지도 아직 잘 모르겠고요. 괜히 시간만 낭비한 건가 싶어요.”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말했다.
“그 말, 나도 예전에 똑같이 했던 적 있었어.”
그 친구가 고개를 들고 내 쪽을 바라봤다.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같은 나이 또래들이 너무 앞서 나가 보이니까
나는 괜히 뒤처진 것 같고... 근데 돌아보면, 그때그때 뭐라도 해봤던 순간들이 그냥 흘러간 시간이 아니더라.”
나는 잠시 말을 고르고, 이어서 말했다.
“그게 그냥 시간 때운 게 아니라, 그때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되는 과정이었어. 내가 어디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뭘 할 때 흥미가 생기는지, 어떤 환경에서는 스스로를 좀 놓치게 되는지도, 그런 걸 겪으면서 하나씩 알아가는 거야.”
그 친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나의 길을 곧게 가는 것도 좋지만, 여러 방향을 지나오면서 보이는 것도 많아. 그게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서 힘을 얻고 어디에서 지치는지를
좀 더 입체적으로 알아가는 시간이었달까.”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직업 하나 정했다고 거기가 인생의 종착지는 아니잖아. 그건 그냥 과정 중에 하나고, 중요한 건 네가 그 시간 동안 뭘 보고 뭘 느꼈느냐야. 조금 돌아갔다고 해서 잘못된 게 아니고, 그만큼 다양한 너를 만나본 거지.”
나는 마지막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헤매고 있는 게 아니야. 너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야. 그 순간순간들이 쌓여서 결국 너라는 사람을 만드는 거야.”
그 친구는 고개를 숙였다가, 조용히 말했다.
“... 그 말, 좀 멋진데요? 만숑님은 그런 걸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나는 가볍게 웃었다.
“나도 예전에 누가 그렇게 말해줬거든. 그래서 그냥, 너한테도 그대로 전해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