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자존감과 감각 사이

by 만숑의 직장생활

자존감을 있다, 없다로 가르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을 몇 가지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부터가 애초에 어색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이 높거나 낮을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힌트는 있다. 그건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굳이 지표나 서열로 바꾸는지 그 표현을 관찰하면 된다.

예를 들어, 같은 여행 이야기를 들어도 사람마다 꺼내는 말은 꽤 다르다. 누군가는 그 도시에서 느껴졌던 공기를 이야기한다. 따스했던 햇빛, 골목 끝에서 보이던 색감, 우연히 들어간 작은 미술관에서 본 그림 한 장.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에도 장소 이름보다 그때의 느낌이 먼저 나온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 도시에서 무엇을 봤는지부터 정리한다. 어디를 갔고, 몇 군데를 돌았고, 유명한 곳은 빠짐없이 봤는지. 여행이 끝나면 기억은 자연스럽게 목록처럼 남는다. 봤다, 안 봤다. 많이 봤다, 적게 봤다.

기념일에 좋은 식당에 다녀온 이야기도 비슷하다. 누군가는 음식이 나오는 순서가 좋았고, 자리가 조용해서 오래 앉아 있기 편했고, 그날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고 말한다. 그러면 꼭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거기 미슐랭 몇 개야?”
“그 정도 가격이면 더 좋은 데도 많지 않아?”

이야기는 맛에서 등급으로, 기억에서 서열로 옮겨간다.

커피를 함께 마셔도 말의 초점은 서로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커피에서 나는 그윽한 향이나
손에 닿는 따스한 온도를 이야기한다. 그 옆에서 누군가는 가격을 말한다.

“여기 말고 앞에 저가 커피 마셔. 훨씬 싸.”
“이 가격이면 주식 몇 주는 사겠다.”

커피는 잠깐의 여유로운 경험이 아니라 다른 숫자로 환산된 무언가가 된다.

늘상 입고 다니는 옷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피부 톤이랑 잘 맞는다거나 색감이 예쁘다고 말하고, 전체 분위기가 자연스럽다고 한다.

그러면 꼭 브랜드를 묻는 사람이 있다. 어디 거냐고, 비싼 거냐고. 옷은 어울림보다 정보로 기억된다.

이런 장면들을 보다 보면 한 가지 차이가 또렷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눈앞에 있는 걸 그대로 느끼고, 그대로 좋아할 줄 아는 '감각'이 있다.

아마 내가 그런 장면들에서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 건, 세상을 대하는 기준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그 순간 순간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그 감각이 잘 작동하지 않는 쪽에서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다른 언어가 필요해진다. 그래서 감각을 대신하기 위한 외부의 기준이 호출된다. 숫자, 등급, 이름, 순위 같은 것들.

물론 이 방식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경험을 숫자나 정보로 정리하는 언어는 분명 많은 순간에 필요하다. 여행을 정리하고, 선택지를 비교하고, 상황을 빠르게 판단할 때 그 언어는 가장 효율적이다.

다만 어떤 순간에는 굳이 다른 값으로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경험들이 있다. 좋았으면 좋았던 채로, 느꼈으면 느낀 채로 남겨두어도 충분한 시간들.

문제는 가끔 그 기준들이 경험을 설명하는 선을 넘을 때 생긴다.

여행은 경험이 아니라 얼마나 봤느냐로 정리되고,
식사는 맛이 아니라 어디 급이었는지가 되고,
취향은 느낀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것인지로 환산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경험은 지표가 되고, 지표는 비교가 되고, 비교는 곧 서열이 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함께 남는다.
서열화하기 쉬운 외부 기준의 언어를 쓰는 사람이 곧바로 자존감이 낮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언어에 너무 많은 걸 기대게 될수록 자존감을 유지하는 일은 조금 더 어려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

자존감이라는 게 대단한 확신이나 강한 자신감이라기보다, 이미 주어진 순간을 굳이 다른 값으로 바꾸지 않고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느낀 걸 ‘어떻게’ 느꼈다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좋은 걸 ‘왜’ 좋아했다고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아마 내가 자존감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들은
대개 그런 장면들에서였던 것 같다.

이전 19화[19화] 자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