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을 나중에 할 때의 장점

with 드라마 <눈이 부시게>

by 만타

JTBC 월화 드라마 <눈이 부시게>(연출_김석윤, 극본_이남규, 김수진)의 로그 라인은 다음과 같다. "주어진 시간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여자와 누구보다 찬란한 순간을 스스로 내던지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남자,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두 남녀의 시간 이탈 로맨스" 분명 판타지 로맨스물을 보여주겠다고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말해왔고 후반부까지도 통통 튀는 분위기의 판타지 로맨스물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0화의 마지막, 한 장면으로 인해 드라마의 장르가 바뀌었다! 이야기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건 달리 있었다. 시간을 돌리는 시계를 사용한 부작용으로 원래 나이는 25살이지만 노인이 된 '혜자'가 실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이었다는 놀랄만한 반전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충격이었다. 알츠하이머 환자 캐릭터가 주체적으로 마주했던 세상은 비시청자들에게도 화젯거리가 되었다. 심지어 여러 신문에서도 문화 면에 이 사실을 실었는데, 이야기가 숨겨오던 하고 싶은 말을 터뜨렸을 때 얼마나 화제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현상이었다. 이 덕택에 <눈이 부시게>는 마지막화에서 9.7%(닐슨)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아래에서는 이 드라마의 거대한 강점을 짧게라도 더 말해보고자 한다.


눈이부시게1.jpg ▲"시간 이탈 로맨스"라고 홍보해놓고 메인 포스터와 티저 포스터에 남주와 여주가 나오지 않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1) 배우 김혜자였기 때문에

제작발표회에서 김석윤 감독은 '김혜자' 역으로 김혜자 배우를 캐스팅하며 "대체 불가"했다고 밝혔다. 25살의 혜자를 연기했던 한지민 배우 또한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김혜자 배우 때문이라며 "굉장히 짧게 나오더라도 선생님의 젊은 모습을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스러웠다"라고 말했다. 드라마가 종영한 시기에 돌이켜 보자면 하나 틀린 말이 없다. <눈이 부시게>에서 묘사하는 코믹함과 정서는 김혜자였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또 김혜자였기 때문에 마지막의 반전이 노인 세대와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승화될 수 있었다. 이 드라마의 호흡은 배우 김혜자의 호흡과 같다. 많은 회차에서 드라마는 김혜자의 독백 혹은 독백과도 같은 대화로 끝난다. 7화에서 "할아버지는 젊음 하고 뭘 맞바꾸신 거예요?"로 시작되어 "뭐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길 바라요"로 끝나는 2분가량의 혜자의 독백과 같은 대화, 10화에서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며 혜자가 알츠하이머가 있음을 밝히는 독백, 마지막화에서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며 한낱 꿈과 같지만 살아서 좋다는 독백은 드라마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한 회 분에서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독백에는 김혜자 배우의 호흡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데, 김혜자가 아니었다면 누가 이렇게 시청자들을 집중시킬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2) '설득'을 넘어서 '공감'까지

주인공이 사실 알츠하이머 환자였다는 반전이 밝혀진 후 많은 시청자들이 "노인의 시선으로 생각해볼 수 있어 좋았다"는 평을 남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설득당했다기보다는 공감을 했다는 표현이 많다. 설득의 이야기 구조였다면 이 드라마는 '시간 이탈 로맨스'로 홍보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을 처음부터 내세우며 '노인들이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 한 번 잘 생각해봐, 젊은 세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을 것이다. 드라마가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에 따라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을 설득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을 것이다. 타인이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 살펴보는 행위는 이미 '나'와 '타인'을 구분 지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이 부시게>에서 주인공 혜자는 반전이 밝혀지기 전까지 몸은 노인이지만 정신은 25살인 캐릭터였다. 주인공이 처음부터 이해의 대상으로 편입되지 않으면서 주인공과 시청자는 같은 시선으로 드라마 속 세상을 보게 되었고, 그 시선이 사실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의 시선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시청자들은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눈이 부시게>는 이 점에서 정말 훌륭한 드라마다.


3) 그렇지만...

김석윤 감독과 이남윤 작가는 여러 작품을 같이 해온 콤비다. 드라마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송곳>, 영화 <조선 명탐정> 시리즈를 같이 해왔으며 둘의 가장 최근 작품은 2018년에 개봉한 영화 <조선 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이다. <눈이 부시게>의 마지막화 엔딩을 보면서 바로 <조선 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의 엔딩이 생각났는데, 두 엔딩 장면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눈이 부시게>: 모든 갈등이 끝난 후, 혜자(김혜자)는 수평선 아래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해를 바라보는 혜자를 카메라가 타이트하게 잡는다. 현재의 혜자의 모습이 과거 혜자의 모습으로 바뀐다. 과거 혜자는 현재에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안는다.
<조선 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 모든 갈등이 끝난 후, 여주(김지원)는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 해를 바라보는 여주를 카메라가 타이트하게 잡는다. 현재의 여주의 모습이 과거 여주의 모습으로 바뀐다. 과거 여주는 현재에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안는다.

<눈이 부시게>에서 엔딩 장면은 드라마에 꼭 필요한 씬이었으며 드라마의 주제와 분위기를 감명 깊게 그려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연출자의 신작이 전작과 내용과 연출이 복사한 것처럼 같을 때에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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