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영화의 경계

with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by 만타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해외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연출_박찬욱)은 위와 같은 이유로 많은 씨네필들의 관심을 끌었다. 왓챠는 <리틀 드러머 걸> 전 회차를 극장에서 상영하는 행사를 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200석 남짓의 상영관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권 추첨에 응모했다. 3월 29일 왓챠플레이를 통해 공개된 <리틀 드러머 걸>에 관한 기사는 영화 관련 기사로 접해볼 수 있었으며 자막 번역에 참여한 사람은 <웜 바디스>, <로건>, <데드풀> 등을 번역한 유명 영화번역가 황석희다.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은 작품을 향한 관심이나, 마케팅 요소를 봤을 때 드라마보다는 영화 같다. 이미 드라마를 본 여러 사람들 중에도 한 편을 몰아보니 드라마를 본 게 아니라 영화를 본 것 같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걸까? 드라마와 영화는 명확한 구분이 가능할까? 이번 글은 <리틀 드러머 걸>을 통해 드라마와 영화의 경계를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리틀 드러머 걸 1.png 이것은 드라마인가? 영화인가?

몇 년 전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극장에서 상영되면 영화, TV에서 방영되면 드라마"라고. 그때도 동의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더 그렇다. <리틀 드러머 걸>은 국내에서 감독판이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제공되기 전에 극장에서 상영회를 가졌다. 그럼 <리틀 드러머 걸>은 영화로 분류되는가? 또한 몇몇 인기 드라마는 마지막 회를 팬들끼리 상영관을 대관해 극장에서 보기도 한다. 그 작품은 드라마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다. "극장은 화면이 크니 롱샷과 익스트림 롱샷을 쓸 수 있지만 드라마는 화면이 작아 클로즈업샷과 미디엄 클로즈업샷을 사용하는 게 관례다."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에서 익스트림 롱샷을 쓰지 말라는 법은 어디 있는가? 심지어 요즘은 모바일로 영화를 보는 시대인데, 넷플릭스 '영화'들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 이 같은 물음은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오늘날 드라마와 영화의 경계를 나누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정말이지 하나도 유익하지 않은 시도다. 이미 우리는 둘 사이의 경계가 많이 무너진 시대를 살고 있다. 영화는 극장에서 내려가면 IPTV로, 모바일로 들어온다. 드라마 또한 TV 본방송으로 보는 사람은 갈수록 줄고 VOD로 IPTV나 모바일에서 시청하는 사람은 는다. 영상극을 언제 어디에서나 대중이 소비할 수 있는 시대에 제작자들과 비평가들이 고려해야 하는 것은 영상극이 관객과 시청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하고 재미를 주고 있는지다. 이 말은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 영화가 드라마와 다를 바가 없고, TV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들은 모두 영화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영상이 관객과 만날 형식이 어떤가에 따라 영상 속 의도가 다르게 표현된다는 말이다. 실제 박찬욱 감독도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TV시리즈에서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다음 화에 대한 궁금증을 남기는 클리프행어 기법을 "드라마를 한다면 꼭 해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리틀 드러머 걸>에서도 클리프행어가 보인다. 그럼에도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처럼 느껴졌던 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작품이 방송판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박찬욱 감독은 시간 부족으로 스튜디오와 충분히 협의하여 감독이 원하는 바가 다 들어간 방송판을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드라마의 TV 방송판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도 궁금하다. 작품의 외부적 요소에 대한 생각을 밝혔으니,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얘기해보도록 할까.


리틀 드러머 걸3.jpg 찰리가 해내야만 하는 '배역'은 드라마의 의도적 불분명함을 잘 표현한다.

영국인 배우 찰리는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에 대응하려는 이스라엘 첩보기관의 작전에 투입된다. 그녀는 테러리스트 미셸을 사랑하는 배역을 부여받고 현실을 무대로 연기를 하는데, 그녀는 미셸을 연기하는 첩보기관 소속의 가디와 실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가디는 현실에서 미셸을 얘기하며 팔레스타인 해방을 얘기하고, 찰리는 연기를 위해서 테러리스트들의 사상을 체화하는데, 그녀의 행동은 연기에 지나지 않는 픽션일까 실제로 동조하는 중일까? 그녀는 그녀를 신뢰하는 테러 조직의 테러 작전에 선수로 투입되는데...


<리틀 드러머 걸>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을 다루고 있는 스파이물이다. 그러나 여타 스파이물과 <리틀 드러머 걸>이 다른 점은 이 드라마에서는 선과 악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이 불분명함은 의도적이다. 드라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중 한쪽의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라 리얼리티와 픽션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인물과 분쟁으로 인한 적대적 감정들의 끝없는 주고받기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행하는 스파이 활동은 배우의 연기와도 닮았다. 어찌 보면 스파이는 현실을 무대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립하는 두 세력 사이의 스파이 활동은 그들의 사활이 걸려있다. 간파당한 쪽은 이용당하고 죽는다. 서로의 행동에 악에 받친 두 세력은 분노만을 주고받는다. 이들은 신념이 있었겠지만, 진정으로 그러할까? 자신이 배역 상 좋아하는 남자와, 그 남자 배역을 맡은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는 점점 배역 상의 남자와 배역을 맡은 남자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작전에 참여하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지만 그 사랑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뒤엉킴을 잘 표현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했다고 하여 드라마를 챙겨 보게 된 씨네필들이 이 영화 같기도 하고 드라마 같기도 한 작품에 대해 가지는 감정과 혼합되어 드라마가 묘사하는 의도적 불분명함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개인에게 불분명함은 큰 불안과 자아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리틀 드러머 걸>은 6화에 걸쳐 불분명함이 몰고 오는 필연적 물음까지 효과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가장 마음에 드는 씬은 마지막화에서 칼릴과 찰리가 나누는 대화이다. 이 대화는 극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데, 큰 스포일러가 될 테니 아직 시청하지 않은 사람들은 주의 바란다.


리틀 드러머 걸4.jpg


"진실을 말해요. 누구 밑에서 일하죠? 독일? 영국? 시오니스트?"

"......."

"당신 유대인이에요?"

"아뇨."

"그럼 당신은 뭐예요?"

"나는... 배우예요."

"그럼 아무 신념도 없이 이러는 거라고요?"

"정말 미안해요."

"(침묵 후) 이럴 가치가 있었기를."


찰리의 행동은 가치가 있었을까? 뒤엉킨 존재의 불분명함을 털어놓음으로써 찰리는 위로받는다. 사살당하는 칼릴을 끌어안고 찰리는 진심으로 통곡한다. 아무 신념도 없이 연기를 했지만 연기는 픽션이자 실재가 되었고 오히려 불분명하기에 그녀는 대립하는 두 세력의 동인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외부인 한 명의 이해가 어찌 대립의 굴레를 벗길 수 있겠는가. 외부인은 불분명함 자체로 인정받으면서 위로받았지만 그 행위는 연출된 현실의 한 장면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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