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표현할 순 없었죠. 약점을 보이는 순간 아이들이 “쌤.. 오늘은 쪼끔만 해요..”, “단어 시험 빼주면 안 돼요?”라고 물고 늘어질게 뻔했으니까요.
학생들을 흔들어 깨우며 수업하다 보니 어느덧 밤 10시가 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축 처진 뒤통수에 대고 늘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얘들아! 쫌만 더 열심히 하자!".
"오늘 집에 가서 문제 쫌 더 풀고 자! 주말에 몰아서 자면 되니까 힘내!!"
"쌤.. 역사 수행 있어서 숙제 못할 수도 있어요..."
맞는 말이었습니다. 정신없이 내신 대비를 하고 수행 평가도 써내야 하는 학생들에게도 시간은 똑같이 24시간뿐이었으니깐요.
"현정아.. 그래도 이번에 한 등급 올리려면 이건 다 풀어야 하니까, 쫌만 힘내서 해. 시험 끝나고 푹 쉬면 되니까, 쫌만 더 힘내! 젭알!!"
매번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내가 '쫌만더 쌤' 된 것 같아 한심하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딱히 다른 대안도 없었죠.
수업이 끝나고 계단을 내려가던 중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공부는 힘들지?' 공부가 왜 힘들까요? 수업 시간에 병든 닭처럼 졸기만 하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진짜 원인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던 2012년 어느 날,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학생들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며 DISC 행동유형검사를 공부해 보라는 권유였습니다. 그렇게 무능한 강사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DISC 행동유형검사는 혈액형으로 사람을 파악하는 것만큼 쉬웠습니다. 혈액형처럼 사람을 4가지로만 분류했죠.
자신감이 넘치고 지배하길 좋아하는지(D),
사람을 좋아하고 재밌는 걸 재밌어하는지(I),
사람과 환경에 대해 안정적인 걸 좋아하는지(S),
항상 신중하고 확실한 걸 좋아하는지(C) 등
4가지로 사람을 분류하여 각 특징을 분석해 주는 것이었죠.
이 단순한 분류방식은 의외로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부하기 싫어하는 원인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죠.
그 당시엔 혈액형으로 사람들을 분류했습니다. 소심하면 무조건 A 형이고, “너 AB형이지?”라는 말에 화를 내던 시절이었습니다. 학생들도 자신의 성향을 점치듯 척척 맞춰 내는 모습에 학생들도 “궁예 세요?”라며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나자 아이들의 호기심도 쪼그라들었습니다. 더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동안 미뤄 왔던 쉬운 구조 독해 개발에 더 매진하였습니다. 그렇게 1주일 만에 5-tool 구조 분석을 완성시켰습니다.
DISC 행동유형검사와 5-tool 구조 독해의 시너지가 좋았습니다. 학생들은 영어공부 자체에 흥미를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를 싫어하던 학생들의 성향에 따라 칭찬과 말투를 바꿔가며 수업을 했습니다.
영어 공부가 할만해지자 영포자 학생들도 영어가 재밌다며 학원 오는 것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이들이 딱 3주 동안만 싱싱했습니다. 1달을 넘기지 못했죠. 3주가 지나면, 또다시 병든 닭이 되었습니다. 고민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어느 순간부터 학생들에게 구질구질하게 지난 이야기만 되풀이했습니다.
"민지야.. 열심히 잘했잖아, 쫌만 더 힘내자.. 할 수 있어.. 힘내자 제발.. ㅜ__ㅜ"
과거에만 매달려 질척거리는 제 자신도 싫었습니다. 하기 싫다는 학생들을 억지로 학원에 불러 보충을 해주는 일도 점점 지쳐 갔습니다. 또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2014년 어느 날, '문제는 무기력'이라는 책을 접하면서 학생들이 학교나 학원에서 잠만 자는 근본적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박경숙 교수의 저서 ‘문제는 무기력이다’를 읽던 중 마틴 셀리그만 박사가 강아지에게 했던 못된 실험을 읽게 되었습니다. 도망치지 못하게 케이지에 넣어 놓고 전기 충격을 계속 가했을 때 강아지는 케이지를 탈출할 의욕을 잃어버리는 ‘학습된 무기력 learned helplessness’에 관한 실험이었습니다. 쉽게 학습된 무기력이란 '본인의 의지로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겪게 되는 우울과 무기력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학생들이 학교, 학원에서 잠만 잤던 이유는 ‘어떻게 해도 괴로운 공부를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학습된 무기력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학생들에게 공부는 전기충격과 같았습니다. 공부 자체가 무기력을 만들어낸 것이죠. 막상 학교 밖에서는 활기차게 잘 노는 아이들도 학교 학원에서는 무기력해졌습니다.
졸고 있는 아이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기 충격을 받고 있는 강아지로 보이기 시작했죠. 더 이상 강압적으로 공부를 시킬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전기 충격에서 꺼내어 전기가 흐르지 않는 저쪽 편으로 옮겨 주고 싶었습니다.
못된 강아지 실험 말미에는 무기력에서 탈출하는 실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하고 끈기가 필요한 방법이었죠.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써먹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기력한 학생들을 전기 충격에서 꺼내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사이 학생들은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며 학원을 옮기거나 공부를 쉬는 학생들이 생겨 났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방법을 찾던 중, 뜬금없는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였습니다. ‘금전적 보상이 오히려 동기를 저하시킨다.’는 흥미로운 실험이었습니다. 이 실험을 고안한 '에드워드 L 데쉬 박사'의 책을 인터넷에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절판되어 구하기도 힘들었던, 마음의 작동법이란 책을 정가의 3배를 주고서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학생들을 바라보는 시야가 확 달라졌습니다. 또 한 번 업그레이드가 되는 느낌이었죠.
자율성을 부여하는 일은 도전 그 잡채였습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수업 방식을 도입하려니 겁부터 났죠. 방식은 간단합니다. 공부할 양을 선생님과 상의 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데쉬 교수가 책에 적은 것처럼 인내력을 가지고 3~4 주만 힘겹게 버티면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효과는 즉시 나타났습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