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냐 정혜승 Sep 26. 2016

<5년 만에 신혼여행> 멍해져도 괜찮아

소소하게 싸우고 행복하고.. 미안하지 않으면


작가가 멍해졌다는, 보라카이의 선셋세일링 이미지. 검색펌.

붉게 물들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신이 다시 멍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니는지, 왜 자전거를 타고, 왜 수십km 달리며 러닝하이를 느끼려 하는지.사람들은 멍해지려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나도 순간 깨달았다. 왜 가볍고 말랑말랑한 에세이가 필요했는지. 멍해지려고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멍해지는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예전에 멘탈이 너덜너덜해질 때면 만화가게를 가곤 했다. 몇 시간 보고 나오면 멍한게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좋았다. 생각을 한다는 건, 무슨 생각을 해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게 탈이란 애기도 들었거늘.


오늘은 내게 휴식을 선물해 주기로 한 날. 진지하고 묵직한 정보 대신, 슬프고 아픈 이야기 대신  <낮의 목욕탕과 술> 같은 책에 빠지고 싶었다. 서점 에세이 코너엔 딱히 마음에 드는게 없었다. 사실 평소 에세이는 즐겨 읽는 부류가 아닌지라 더더욱. 소설 코너도 주제가 무겁거나 중량이 무거웠다. 문득 지난번에 서점 마실 때 살짝 들춰보고, 역시나 흡인력 있던 장강명 작가의 에세이가 생각났다. 술술 읽히기 시작했고, 저 대목에서 나도 놓쳤던 내 마음의 비밀을 알았다.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했던게 분명하다.


장강명 작가는 <한국이 싫어서>로 처음 만난 뒤, '당신도 심쿵하는가'라고 장황한 리뷰를 남겼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휘리릭 읽은 뒤, 다시 <댓글 부대>에 심쿵. '픽션이라고 강조해보지만' 


이 책은 에세이다. 그가 신혼여행을 다녀온 얘기가 전부라면 전부. 그런데 깨알 같은 온갖 스토리가 거기에 다 얽혀있다. 알고보니, 작가의 아내 HJ가 연애하다가 호주로 가버린, 바로 <한국이 싫어서>의 여주인공 계나 모델이고, 자신은 계나의 남친 기명이었다나? 그리고 그는 결혼식을 구청에서 혼인신고 하는 걸로 끝냈다. 식장을 잡고, 봉투 수거할 하객들을 부르고, 온갖 허례허식 덩어리인 결혼'식'을 거부한 인간이다. 와우. 심지어 부모도 부르지 않았다. 아내와 부모를 화해시키고 친하게 지내도록 하는데 에너지를 쓸 생각이 없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부모에 대한 관계도 우리 모두 그렇듯이 애증의 연속인데 차분하고 서늘하게 얘기한다.


한국 부모의 공통 문제..자식들 인생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 자식이 타인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자식 인생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정신적 폭력을 서슴치 않는 것. 그리고 나는 그 부모들을 이해한다. 그런 폭력의 원인은 대부분 사랑

마루야마 겐지 할배도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 일갈했었지. "자식을 생각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건 교활함. 그저 낳았을 뿐인데 자식을 소유물로 간주. 학교며 직장이며 결혼상대며,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자신이 깔아놓은 레일 위를 달려야 마땅하다고 믿는. 진저리 나도록 뻔뻔한 부모" (메모)

효를 최고의 가치 중 하나로 배웠지만, 대개 지지고 볶는 일이 더 많은게 가족. 자식은 부모를 벗어나는게 성장의 기본 단계지만, 우리는 점점 더 발목을 잡는 구조다.


장강명은 한 발 더 나아가 '애완 인간'을 이야기한다. 요즘 심심찮게 듣는 얘기들. 수강신청은 물론 행정고시 모집요강 알아보는 것도 부모가.. 야근도 해주는 부모..

과보호 감옥..'애완 인간'. 교수 판검사 의사 회계사 MBA 대기업 직원 중에 그런 애완 인간들..요즘 한국에서는 애완 인간으로 살아야 그런 직업을 가질 확률이 높아진다. 자기 돈으로 미국 유학가거나 로스쿨 학비 댈 20대가 몇이나..

잘나가는 엘리트들일수록, 이 사회의 리더 집단일수록, 애완 인간일 가능성이 높아지는게.. 저런 자본의 논리라니, 어쩐지 또 다른 의미에서 멍해지지 않는가? 


장강명의 고백 중 기자 생활에 대한 대목도 와닿는다. 절절하게. 당연하지 않겠나.


하루 열두 시간보다 적게 일한 날은 기자 생활을 통틀어 정말 며칠 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청춘을 다 바쳤다. 힘들었지만 즐거웠던..그러나 10년 조금 넘게 일한 뒤에, '이 일을 계속하는 건 내 길이 아니다'라 깨닫게 되는... 기자라는 일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자기혐오와 회의감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 업무 자체가 양립할 수 없는 가치(예를 들어 '신속'과 '정확' 같은)를 과도하게 요구한다. 단순히 노동강도만 높은게 아니라 사람을 계속 강한 도덕적 긴장 상태로 몰아넣는다.


정말 열두 시간 보다 적게 일한 적이 있기나 했나? 낮술 먹고 뻗지 않는한 없는 듯. 낮술 조차 일의 연장선이었는걸. 청춘을 바쳤고, 즐거운 순간도 많았는데. 떠날 무렵엔 몸보다 혼이 더 힘들었던.. 에이. 삼천포.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살다가, 멀쩡한 직장 때려치고 1년의 유예를 받아 그 해 30만원 벌이가 다 였던 작가. 어찌저찌 간신히 5년 만에 신혼여행을 다녀온 얘기다. 당연하게도 '길 위에서' 고단함은 쌓여만 가고, 한바탕 아내 울리는 부부싸움도 필수 코스. 작가가 생생하게 쓰기도 했지만, 우린 다 안다. 비슷한 경험들은 누구나 수백 번 해봤을 터. 그런게 사는 얘기. 그의 아내는 가난한 집안의 자식 답게 가성비 따져가며 행복을 느끼는 타입이란걸 남편도 문득 깨닫는다. 그 대목에서 나도 깨닫는다. 나 역시 매사 까칠한 아빠 덕에 과한 절제에 길들여진 인간이었나. 호사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DNA가 있었나. 덕분에 공감지수는 조금 더 올라가고.


고생길 같은 여행담이기도 한데, 다 읽고 나면 여행가고 싶은 욕심이 슬슬 생긴다. 애들 두고 여행 못 간다는 입장인 나는 애들 떼어놓고 둘이 가자는 철없는 남자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는데...인생 별거 있나. 난 좀 더 놀아야 하는게 아닐까?


생일이라고 딸에게 편지를 받았다. 남편과 딸은 미역국을 끓여줬다. 아침엔 이불 빨래를 돌리고, 소설 좀 보면서 뒹굴거리다가, 강남역에서 비싸지 않은 셔츠를 사고, 서점에서 에세이를 읽었다. 정말 나를 위해 잘 보낸 하루였고, 책도 좋았는데... 다 좋았는데.. 작년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던 백남기님이 오늘 낮 돌아가셨다. 사과 한 마디 없었는데. 언제나 사회에 관심 많던 농부 할아버지가 시위 현장에서 쓰러진 뒤, 두번 다시 깨어나지 못했는데..

그냥, 맘 편히 소소하게 행복한 것도 미안한 시대라면, 그건 좀 너무하잖아...  편히 쉬기를 바란다는 말이 너무 성의 없이 들려서.. 잘 다스린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적절한 몰입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