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냐 정혜승 Oct 14. 2016

<듣도 보도 못한 정치>Why Not? 다들 시작했다

낡고 구태의연한 정치 대신, 즐거운 일상의 정치


올해 초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의 조희정 선생님 덕분에 재미난 세미나에 다녀왔다. 당시 발표자 중에 한 분이 와글(WAGL) 대표 이진순님. 와글와글한 군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실험을 하고자 한다는 와글. We All Govern Lab은 해묵은 정치 문제를 풀기 위해 혁신적 솔루션을 찾겠다는 'Political Venture'라고 했다. 신선하지 않은가? 정치라면 어쩐지 진부한 느낌인데ㅎㅎ 

이진순님. 이 사회, 내 나이 쯤 되면 일하는 언니들이 좀 귀하다. 이런 언니는 존재 자체로 힘이 된다.


책은 바로 와글이 카카오 스토리펀딩을 통해 연재했던 내용이다. 

대표 저자가 이진순님. 워낙 전설 같은 분이라지만, 옛 일은 내가 알 도리 없고. 지난 몇 년 한겨레의 특별한 시리즈 '이진순의 열림'으로 신뢰하는 저자다. '듣도 보도 못한 정치'는 사실 연재 당시에도 매혹당해서 꼬박꼬박 챙겨봤다. 그럼에도 책으로 다시 한 달음에 봐도 재미있다! 

  

인터넷 정보 공유가 정보전염병..여전히 국민들은 '통치의 대상'이지 '권력의 주체'가 아닙니다. 국민은 우매하고 단순하고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 존재여서, 정보와 권력을 함부로 나눠주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아직도 지배적 담론입니다.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는 그조차 진부하다. 새로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그렇다. 실제로 와글의 주장은 새롭지 않다. 다수결 폐해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건 수평적 시민 토론에 의한 집단적 의사결정 제도화. 실효성 있는 견제와 균형 위해서는 엘리트의 삼권분립에 만족하지 않고 시민이 입법 행정 사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춰야 한다. 자, 너무 당연한 얘기이지 않은가. 


와글이 재미있는 건, 한 발 더 나아가는 벤처 정신이다. 일단 구체적 솔루션을 제시한다. 제도 측면에서 일상적 정치 가능하도록 사전선거운동 금지조항 없애고. 전국 5대 지역 5000명 서명 받아야하는 정당 설립요건 완화. 의원 후보 1인당 1500만원 기탁금 폐지/축소. 전세계 유일한 19세 투표연령을 세계 기준 맞게 18세나 16세로.. 이런 주장은 전문가들 사이에선 새롭지 않더라도 대부분 저런 장벽이 있는지도 모르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면 2014년 봄에 정당 설립 요건이 궁금해져서 알아보고 좀 놀랐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


정치는 아무나. 대신 1) 약속한 바를 엄격하게 이행하는 책임정치 2) 시민의 요구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소통정치 3) 재정과 의사결정 과정을 빠짐없이 공개하는 투명정치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북돋는 정치를 해보자는 거다. 그리고 시민주도형 정당의 공통점을 꼽는다. 1) 정책, 공약, 선출은 토론과 표결로 2) 3선금지, 연봉상한제 등 직업정치인 특권 배제 3) 공직자 퇴직후 3년간 재산공개 등 투명한 정보공개로 부패 방지..


역시 다 좋은 얘기 아닌가? "목표는 정권교체가 아니라 게임의 룰을 바꾸는것" 

그리고, 여기서부터 <듣도 보도 못한 정치>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 아는 얘기, 혹은 당위, 방향과 철학만 논의하자는게 아니다. 실제 사례가 있다.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생생한 이야기. 


대출금 못갚아 매일 500가구가 거리로 쫓겨났단다. 2012년 스페인 상황이다. 풀뿌리 시민단체 PAH가 모였다. 가계 부채를 개인이 아니라 금융자본주의 폐해라고 의제로 만들었다. 은행 편만 드는 정부의 무능에 강력한 시민불복종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나섰다. 이들이 정당까지 만들었다. 그 정당이 2015년 바르셀로나 제1당이 됐다. 


'바르셀로나 엔 코무' 소속 시의원은 크든 작든 지역의 구체적 이슈, 약자와 소수자 권익보호, 주민자치권 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우리 국회에는 사업가, 혹은, 판검사 변호사, 교수만 있지 않던가? 지역의 국민을 대표하거나, 직능을 대표해야 하는데 비슷하게 잘나고 성공한 이들만 하는게 정치. 그래서 그 정치가 좋았던가? 스페인의 시도가 의미있는 건, 말이 아니라 진짜로 '보통 사람'들이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라고, 정치적 무관심과 정치적 독과점을 가져오는 200년 된 정치시스템에 매달리는 대신 모두가 참여하는 새 민주주의를 시도한다. 디지털 시대니까! 


스페인 친구들은 주제별로 정책 제안을 모으고, 온라인으로 의사결정하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아고라 보팅'이라는 온라인 시민 투표에 5000명이 참여한다. 노인에게 노인 위한다고, 청년에겐 청년 위한다고, 기업에게 좋은 말만 하는 모순된 정치적 거짓말 대신 시민 합의라는 걸 시도한다. 

선거공약 못지키면 견책 파면하는 내부 규율은 따로 만들었다. 누구와 만나 뭘 논의했는지 일정과 회의록을 공개하고, 재산은 공직 떠난 뒤에도 3년까지 공개하자고 했다. 공직 종사후 5년간 유관기관으로 옮기지도 못한다. 취약계층과는 정기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윤리규약도 있다. 흥미로운 건, 우리도 비슷한 공무원 윤리헌장 있다고ㅎㅎ 


 

바르셀로나 시장 Ada Colau. 지인 통해 은행 임원들이 밥이나 먹자는 제안, 시장과 만나는게 목적이라면 모두 공적으로 돌렸다. 약속 잡고 미팅 하고 대화 내용은 모두 공개한다


그리고, 주택담보대출 피해자를 상대로 긴급자금 지원을 확대했다. 압류한 집을 보유한 은행과 협상해 소셜하우징도 확대했고, 압류주택 2년 이상 보유한 은행에게는 과태료를 부과했다. 취약계층에게는 수도와 전기비를 지원했다. 이 과정을 함께 한 스페인 15M 운동에는 58개 도시 600만명이 참여했다.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정부 비판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가 SNS로 시작한 정당이다. 오성? 다섯 가지 목표가 분명하다. 공공수도, 지속가능한 교통수단/개발, 인터넷접속권, 생태주의 등. 창당 4년만에 2013년 총선에서 상원 24%, 하원 25%를 휩쓸면서 단일 정당으로는 2위에 올랐다. 오성운동은 공천 방식도 온라인 투표로 정한다. 주요 도시 지방선거 당선자는 모두 30대 여성이라고.

로마 시장 Virginia Raggii은 최근 2024년 올림픽 유치 거부. 1960년 올림픽 빚잔치도 안 끝났는데 누구를 위한 올림픽이냐고 해서, 전세계에 신선한 충격ㅎ


2014년 창당해 2015년 12월 총선서 양당구도 깨고 20% 득표한 스페인 포데모스는 스타트업 정당이다. 78년생 정치학자 파블로 이글레시아스가 유튜브 시사토크쇼로 시작한 정당이다. 40만 당원 모두 디지털로 직접 참여한다. 시민 싱크탱크 라보데모가 기여했다고.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젊고 신선한 이미지.

2013년 아이슬란드 국회의원 63명 중 해적당 국회의원 3명이 탄생했다. 해적당은 스웨덴 독일에서 반짝 하는 줄 알았더니, 2016년 5월 아이슬란드 해적당은 정당지지도 43%. 주35시간 노동, 직접민주주의 시민발의 제도화, 국회의원 장관겸직제한 등을 내걸고 있다. 새로운 접근으로 기존 관습과 규칙을 바꾸는 해커야말로 21세기 정치에 가장 어울리는게 아닐까? 



이데올로기? No. 기본권 보장과 민주주의 혁신이 상식과 보편. 이게 정치. 


듣도 보도 못한 정치를 만드는데 신선한 사례에만 집중할 수 없다. 아랍에서도 디지털 혁명을 시도했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는게 페이스북이 한 몫 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정치란 참여도 중요하지만, 참여를 통해 민의를 공론화시키고 주장을 담아내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렇데 어떻게? 책의 후반부는 그런 정치 플랫폼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이상적으로만 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일들이 실제 이뤄진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이슈에 대해 얘기할 수 있고, 간단한 결정이 가능한 온라인 공간. 개발자 20여명이 모였고, 5690달러를 모아서 루미오를 만들었단다. 이들의 두번째 크라우드펀딩엔 12만달러가 모였다. 투표하면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코멘트를 서로 나누면서 생각이 바뀌면 재투표도 한다. 그야말로 공론장이다. 


극단적 충돌로 이어지는 논쟁 대신 합의를 유도한다. 뉴질랜드 웰링턴시의 대출신탁 심사 논의, 브라질 버스 운임 인상에 반대하던 시민들 논의, 헝가리의 대학 학비지원 심사에 항의하는 논의를 루미오로 진행했다고 한다. 


뉴질랜드 청년들이 '우연히' 개발한 루미오. 주제를 정하고, 의견을 올리고, 의견을 표시하고..이용자 자신들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 오픈소스로 만들어져 전세계 개발자들 지원하는 점이 비결. 막막해도 변화는 일어난다.


냅스터 만들고 페북 공동창업해 24살에 초대 CEO 였던 션 패커. 14년 930만달러를 투자해 정치 플랫폼 브리게이드를 선보였다. 같은 의견 사람들끼리 논의를 시작, 비슷한 사람들을 추천하고, 새 온라인 그룹을 만들고 실천을 모색하게 연결해준다고. 투표 참여를 독려하면서 오프라인 네트워크도 지원하고.. 흠흠. 실리콘밸리의 젊은 리더의 시도라 나름 관심이 간다. 사이트 들어가보면.. 깔끔하다.


책에는 브리게이드가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새로운 소통의 장을 열고 있다고 소개하는데.. 그런데도 이 모양이란 말인가 싶기도ㅎㅎ;;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15세기 정보기술을 바탕으로 19세기에 고안된 정치제도와 살아갑니다. 사용되는 언어는 변호사들만 이해할 정도로 난해합니다. 몇 년에 한 번 권력자를 선택할 수 있지만, 그들이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완전히 소외... 정치를 혐오하게 만들어 침묵하거나, 그저 무의미한 소음만 생산하게 되죠. 시민이 원래 무관심하고 무책임?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공청회에, 휴가를 내지 않으면 갈 수도 없는 평일에 열리는 공청회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 피아 만시니

이런 시도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는 것도 신기하다. 데이터 시각화로 응답자들 생각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온라인 의사소통 도구 폴리스. 대만 정부는 우버택시 도입 관련, 폴리스를 통해 2000명이 온라인서 2시간 회의를 가졌단다.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대만 거브제로(g0v)는 2012년 정부의 경제개혁정책홍보에 반발한 개발자들이 정부 정책 오류를 시각화하는 해커톤으로 시작한 운동. 정부 예산과 공무원 해외연수, 정치기부금, 의사록 등 정부 투명성 시각자료도 만든다. 대만의 폴리스, 거브제로의 활약에는 전설적 개발자 오드리 탕 스토리가 또 대단한듯. 링크 찾아봤더니 역시 작성자가 와글이다ㅎㅎ

Audrey Tang, 시빅 해커 출신 대만의 디지털 장관. 14세에 학교 중퇴, 16세에 창업, 실리콘밸리로 간 전설적 개발자. 


정부 홈피 따로, 정보공개 페이지 따로, 민원 따로.. 이런 흔한 구조 대신 토론-제안-투표-결정을 한번에 해결하도록 한 디사이드 마드리드. 시민 의견이 1년 내 마드리드 인구 1%(2.7만명) 지지 받으면 자동으로 시 의회로 넘어가 공식 논의를 하게 된다고 한다.

핀란드도 12년 일반 국민이 입법발의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6개월 내 유권자 1.2%인 5만 명의 지지 서명과 함께 제출하면 국회에 자동 회부된다고. 정작 이 과정에서 정부의 대응이 늦어지자 스타트업이 등장해 또 만들었다. '오픈 미니스트리'. 세월호 진상조사 촉구 국민 서명이 650만명에 달해도 더 나아가지 못했던 걸 생각해보면.. 시민의 의견을 모아 입법 절차를 만든 마드리드와 핀란드 사례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캐나다 비영리 스타트업 Open North 의 시티즌버젯 서비스. 예산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는 사이트다. 몬트리올시 플라토구는 732명이 참여한 예산 시뮬레이션으로 일반세보다 특별교부세 납세를 선호하고, 공공예술 지출로 어느 정도 적당하다고 보는지, 시민이 원하는 예산 우선순위를 파악했다.



인터넷이 원래 민주적?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중립적 공간? 저절로 참여가 이뤄지는 곳은 없다. 디지털 미디어는 시민운동 취지를 확산시킬 수 있지만 신뢰와 연대 기반 집단행동 네트워크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온-오프가 연결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책은 인터넷이 자유롭고 평등한 상호교환을 가능하게 할 거라는 식의 사이버 이상주의를 경계한다. 온라인에서도 불평등과 차별이 확산될 수 있다. 혐오와 폭력이 훨씬 더 강력한 네트워크로 작동할 수 있는게 온라인이다. 풀뿌리 시민 정치 역시 완벽하지 않다. 이탈리아 오성운동을 이끈 베페 그릴로는 이민자 추방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디지털 세상에서도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권력에 대해 성찰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절절한 이유다. 




반차 휴가만 내도 행복한 시간. 친구 기다리며 바람 살랑거리는 오후에 커피와 책.'냉소와 무력감을 떨쳐내고 밥먹듯 손쉽게 참여하는 일상의 정치'라니. 스토리펀딩 때 재미있던지라 여러 친구들에게 선물ㅎ #듣도보도못한정치  


이렇게 기분 좋게 읽기 시작했다. 재미난 책이고, 목적이 분명한 만큼 이 분들은 스토리펀딩, 책 출간에 머물지 않는다. 브런치도 열어서 다양한 스토리를 계속 전달하고 있고...

글을 정리하면서 하나 둘 찾아봤던 그 모든 사이트들도 한데 모아 정리가 되어 있다. 


로버트 라이시의 <자본주의를 구하라>를 같이 읽은 트레바리 친구 강민구님은 “세상에는 '일을 하는 것' 보다 '일을 되게 만드는 것' 이 훨씬 더 어려울 때도 있다”고 했다. 답은 심플하지만 저걸 어떻게 이끌어낼 것이냐의 문제라고. 그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었다. 실행하는 이들의 이야기. 실제 움직이고, 바꾸고, 일을 되게 만들어낸 이들이 보여준 희망. 기성 세대 혹은 기득권이 해온 것과는 다른 도전. 이탈리아나 스페인은 정말 임계점을 넘어선 절망 끝에 변화가 일어난게 아니냐, 우린 아직 그 단계가 아니지 않느냐는 얘기도 나오지만 그건 단정할 수 없다. Why Not? 다들 달리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