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공모전 네 곳에 당선되는 사람도 나왔다. 나, 장강명. (54쪽)
웬만한 사람은 던지지 못할 자신감에 약간의 서늘한 시선. 공모전이 한국 소설을 망친다는 얘기를 공모전 스타가 하니까 설득력이 늘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작년 여름에 읽은 책인데, 저 54쪽 첫 줄만 기록 남겨놓고 바빠서 넘겼어요. 그런데, 몇 구절 정도는 덧붙여서 기록해놓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논픽션이고, 가치 있는 기록이니까요. 실학자 박제가 선생님의 이 말을 건진 것만 해도 훌륭. 옛 선인의 말에 틀린게 없더라니까요.
어린아이 때부터 과거 문장을 공부하여 머리가 허옇게 된 때에 과거에 급제하면 그날로 그 문장을 팽개쳐 버린다. 한평생의 정기와 알맹이를 과거 문장 익히는 데 전부 소진하였으나 정작 국가에서는 그 재주를 쓸 곳이 없다. (100쪽)
이름 모를 인터넷 방송이나 유선방송.. 우리나라 방송사 등록된 곳이 3000명. 그 곳 아나운서들이 모두 그 한 줄 경력을 갖고 공중파 3사 공채를 노리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조금 더 넓게 잡으면 사내 방송 아나운서, 기상캐스터, 프리랜서 리포터들도요.." (66쪽)
미국 영화에 보면 열심히 경력을 쌓고 좀 더 큰 언론사로 옮기는 기자와 아나운서가 많은데, 최근 기자들은 그 경향이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근데 아나운서는 아닌가봐요. 내부 사다리가 허약하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지적. 성공하려면 처음부터 공공중파로 시작해야 한다는데.. 이게 바로, 지방신문 신춘문예나 장르문학 등단 젊은 작가들의 고민과 정확히 똑같다고요. 그리고 그게 중소기업에서 출발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겠죠.
“그 제도가 타락했어요. 완전히 석화됐어요. 이제는 없애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우리의 문학이 너무 자기 자신이 중심인 소설을 쓰고, 시대정신이나 시대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75쪽)
고 박맹호 민음사 회장님. 2000만부 판매한 이문열의 삼국지가 아니더라도, 한국 출판계의 거목. 공모전의 성과에 대한 자부심에도 불구, 이제는 바꿔야 한다는 인터뷰를 남기셨군요. 평론가들은 시야가 좋고, 자기 취향을 고집하고. 그런데서 어떻게 천재가 나오겠냐고. 우리 문학이 대체로 하향 평준화됐다고요... 그래서 한국을 대표하는 그해의 문제작을 선출겠다는 생각을 했고, 장강명씨의 ‘한국이 싫어서’도 그렇게 주목받은 거죠.. 스스로 가장 성공한 제도도 수명을 다한 걸 알아보는 혜안이라니. 놀라운 분이셨군요.
“새로운 신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지 않으면 그 판에 희망이 없어요. 변화가 없다는 건 무서운 일이죠. 세상에 아기들이 태어나지 않는 것과 같아요.”(85쪽)
강태형 문학동네 대표의 말입니다. 기자 출신의 장강명님은 르포의 형식을 빌어, 소설 못지 않은 속도감으로 주장을 이끌어갑니다. 박맹호 회장님, 강태형님.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이기섭님까지. 사실 공모전에 대해 가장 할 말 할 수 있는, 잘 아는 최고선수들.
책은 당선되고 합격하는 우리 제도가 어떻게 계급화되고 기득권화되는지 차분히 살펴보는데요. 새로운 신인이 등장하고, 세대 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는 그게 안되는 분야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게 어디 문단만의 일이겠습니까. 그 심각성은 위기감을 느껴야 마땅하죠.
“문학 베스트셀러에 한국 소설이 없어요. 지금의 독자들은 읽는 재미, 대중적인 소설을 원합니다. 그런데 한국 문단이나 작가나 출판사는 대개 문단문학적인 미를 추구하는 평가 기준을 가족 있어서, 그게 주류가 되면서 독자들과 멀어졌다고 생각해요” (94쪽)
한겨레출판 이기섭 대표의 말. 굳이 위기를 운운하지 않아도, 소설 독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고백. 왜 우리는 히가시노 게이고에 무라카미 하루키에, 알랭 드 보통, 귀욤 뮈소, 존 그리샴, 스티븐 킹 신작에 달려가는지... 팔리는 규모가 다르잖아요.
문과 시험(정시 초시)를 치는 사람이 정조 때 10만명이 넘었다..19세기 후반에는 20만명.. 최종 합격자는 한 해 서른 명 남짓.. 정작 필요한 인재는 뽑지 못했다고. 암기력과 논리력, 중국어 독해와 작문 실력이 뛰어나기는 했으나..과학기술이나 경제, 민생은커녕 그 시대 국제 정세에 대해서도, 행정, 군사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사회생활을 오래 했다거나 처세에 능한 사람도 아니었다. (100쪽)
21세기 공채 제도는 조선의 과거제도와 얼마나 다를까?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 간 국가 공무원 시험 응시자는 127만명. 합격자는 2만 명도 되지 않는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아 생기는 사회적 손실이 2016년 기준으로 한 해 17조원이 넘는다고 분석 (103쪽)
우리의 온갖 고시, 공시 열풍이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걸 확인하는 것은 생각보다 슬프고, 조금 재미났어요. 시험이라는 공평한 제도에 목숨 걸고, 어쨌든 출세해야 한다는 욕망이 현대 대한민국의 급성장 비결이지 않겠습니까. 잡스나 저커버그 같은 또라이를 걸러내는 공채 제도로 성실한 인재를 탐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작가는 일갈합니다. “두툼한 인사 평가 매뉴얼을 가진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관료 조직이 혁신과 혁명가를 알아볼 가능성은 0”라고요 (162쪽)
상당히 재미있게, 금방 읽은 책입니다. 주말에 아이 학원 앞 카페에서 주로 읽었던 것 같아요. 아이를 대입 합격의 길로 보내려고 나름 최소한의 학부모로서, 이 교육시장의 제도, 관문마다 고비마다 시험이든 공모든 합격이든 그 바닥의 부조리, 아이가 졸업한 이후에 부딪칠 노동시장의 모순을 읽었습니다. 미안했어요. 마음으로만, 멀리로만 말로만 그랬어요.
"어쨌든 취업 성형도, 취업 사교육 강좌도, 취업 부적도, 합격 정장도 잘 팔린다. 얼마나 기괴한가. 얼마나 처연한가" (206쪽)
그럼에도, 2018년 독후감을 거의 기록하지 못한 마당에.. 이 책은 아까워서 기록을 남깁니다. 고민을 버릴 수는 없는 종류라. 작가는 "한국 소설 시장과 노동 시장에서 간판이 그토록 중요한 근본 원인은 그곳이 ‘깜깜이 시장’이기 때문. 간판의 영향력은 오래 가고. 시장 전체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313쪽).. 이렇게 지적하면서, 방향을 얘기합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2016년 임금 체불이 신고된 업체는 13만 여 곳인데 이름이 공개된 곳은 840곳.. 우수 중소기업이 많은데 요즘 젊은이들은 대기업만 바라본다? 가증스러운 기만. 지뢰밭으로 들어가기 주저하는 군인에게 용기가 부족하다고 다그치는 꼴
무작정 작은 기업도 괜찮다고 할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정보를 공개, 깜깜이 시장이 아니라,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라는 것. 이것은 실제 그 영역의 전반적 수준이 함께 올라가야 가능합니다. 실체적 진실이 서글프다면 정보 공개가 무슨 소용 있겠냐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정보 공개의 힘을 빌어, 조금씩 함께 나아져야 부조리에 빠진 경쟁 대신 합리적 비용(시간, 돈, 열정, 체력, 기회비용)을 들여 맞는 일을 찾겠죠. 참 어려운 얘기지만, 우리는 꽤 오래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해외 모범 사례도 있고.. '당선' '합격' 뿐인 세상이 아닌 사회. 상상하고, 또 논의하고... 이 책도 좋은 재료입니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