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초에 리뷰 초안을 써놓고.. 거의 보름이 지났네요. 주말에도 딴 짓 해볼 여유가 없었나봐요. 일단 대충 글을 마무리해봅니다. 한 줄 결론은요? 이 책 권합니다.
술친구 H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추천했던 책. 어쩐지 제목에 눌려 뭔가 들킨 느낌도 들고, 취하지 않고 버티기 어려웠던 시간들이 떠오르면서 힘들고 아플까봐 선뜻 읽지 못한 책. 권여선님의 신작 에세이를 서점에서 흘깃 보면서, 보고싶다 보고싶다 하던 중이었는데.. 인연은 결국 연결됩니다. 멋진 온니 Y님이 점심도 사주고, 책도 주셨어요. Y님은 권여선님과 진짜 술친구인가봐요. 저런 분들과 술을 마시면 어떤 시간이 흐를까 잠시 궁금했습니다.
단편마다 처연한데 담담하고, 단호한데 모호합니다. 사실 이런 책은, 리뷰할 깜냥이 안됩니다.. 그럴 상태도 아닌 것 같고요.. 몇 군데 메모만, 그 느낌만 공유해봅니다.
“해야 할 일도, 지켜야 할 약속도 없었다. 그 무엇도 그녀의 시간을 강제로 구획하거나 갑작스럽게 중단시킬 수 없었다. 자기 앞에 몇 년의 시간이 안개 낀 평원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는 걸 실감한 뒤부터 그녀는 오로지 과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모, 89쪽)
가족이 굴레이고, 짐이 되기도 합니다. 의지하지 않은 종말을 앞두고서야, 그런 모든 것으로부터 홀연히, 표표히 떠나버린 이모. 완전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버릴 법도 한 그 순간, 자기 앞에 몇 년의 시간은 엉뚱하게도 다른 방향으로 몰아갑니다. 안개 속의 평원처럼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인생이라지만, 그 순간 과거에 사로잡히다니요..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것 외에, 디테일한 순간들의 후회에 빠져드는 것 외에.. 그 자유는 어떤 자유였을까요.
주인공 이모는 상당히 매력적인 분인데 이 대목도 참.. 제가 트윗 중단했을 때의 좌절과 절망이 꽤 오래갔습니다.. ㅠㅠ
사실 나는 가족들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온라인 관계를 끊는 게 더 함들 정도였다. 그건 주어진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거였고, 오로지 내가 쓴 글, 내가 만든 이미지로만 구성된 우주였으니까. (이모, 97쪽)
권여선님 글의 매력은, 옮길 수가 없습니다. 삶의 절벽에 부딪친 그에게 말벗이랄까, 팬이랄까, 그런 상황에서 본인의 ‘체념과 적요를 빼앗는 강도’라니요.. 새파란 젊은 주정뱅이가 신도 아닌 주제에 나쁜 친절을 보인 건가요. 이 소설의 마지막 반전은 또 얼마나 황망한지..
강도처럼 내게서 차분한 체념과 적요를 빼앗으려는 당신은 누굽니까? 은은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내 곁을 맴돌고 내 뒤를 따르는,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신도 없는데 이런 나쁜 친절은 어디서 온 겁니까? (역광, 173쪽)
<안녕 주정뱅이>의 백미는..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평론가 신형철의 글입니다. 신형철님 글도 참 좋아했던 시절이 있는데, 참 오랜만이라 새삼스럽네요.
“요즘 권여선의 소설을 읽는 일이 자주 생의 비극성에 대한 가학적, 피학적 사색이 되어버리는 이유를 말해보려고 한다..”
아.. 이 분이 '인생의 악의적인 농담'으로서 권여선의 작품을 설명하는 대목만 봐도 짜릿합니다.. 별 것 아닌 우연들이 삶을 망치기도 하고, 그것이 내 탓이 아니기를 바라고. 억울하거나
마침 페북에서 남궁인님의 이 글을 만났습니다. 인생이 뜻대로 된다면 지루할까요? 그렇게 평온하다면 차라리 좋을텐데. 고통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사소하거나 끔찍하거나 당사자도 관찰자도 힘든게 삶입니다. 생의 비극성이 나머지 온전한 시간을 귀하게 만들어주는 거겠죠..
다시 신형철님 글입니다.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번 책에서 권여선의 소설은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다. 요즘의 나에게 문학과 관련해서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때로는, 고통을 바라보는 자체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아마 2016년의 저는 이 책을 읽어낼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왜 그랬나 모르겠어요. 지금은, 글쎄요. 간만 머리를 씼어내는 기분이었어요. 마음으로 다가오기 보다, 복잡하고 버거운 일들로부터 잠시 떨어져서 바라볼 틈 같은 독서. 그리고 친밀한 당신들과 한 잔 진하게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