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냐 정혜승 Mar 17. 2019

<사랑 예찬>, <향연> 사랑, 그게 뭔가요

2030 연구자 J쌤의 분석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언어였습니다. 요즘 2030이 덜 쓰는 단어와 더 많이 쓰는 단어. 슬슬 외면받는 단어 중에 사랑, 우정, 감동 등이 있습니다. 대신 썸, 반려동물 같은 단어가 상위권에 등장한다죠.
 
아니, 요즘 젊은이들은 대체 왜. 이런 꼰대 같은 접근은 사양합니다. ‘위험 부담 없는 사랑’, ‘안전한 사랑’이 마케팅 용어가 된다한들, “사랑으로 촘촘히 짜여진, 타자에게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험을 완전히 회피하려 한다”(18쪽)고 지적한들, 그건 작은 단편만 본 편견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돌아봤죠. 우리는 사랑을 알고 있나? 사랑을 위해 뭘 하고 있지?


사랑을 책으로 공부하다니. 정말 이런 날이 오기는 오는군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 독서모임에서 읽었습니다. 무려 플라톤의 <향연>과 함께 읽었습니다.
 
 “사랑을 보호하는 것도 철학의 임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르튀르 랭보가 이걸 사랑을 재발명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이 책이 제게 흥미로운 대목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사랑을 옛 사람들은 어떻게 정의했을까,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말하는 사랑은 과연 뭐였을까? 키에르케고르 식으로 “신실한 사랑을 본래의 제 목적으로 향하게끔 돌려놓는 무엇”으로서 결혼을 얘기하는게 사랑의 과정을 제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제도와 상관없이 사랑은 어떤 것일까?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나 종착역이라 믿는 이가 여전히 있기는 한걸까? 플라토닉하든, 섹스를 전제하든, 그 사랑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철학이나 문학이 보호하지 않는, 순수한 감정, 혹은 뇌의 생화학적 작용으로 사랑은 무엇일까? 이쯤되니, 제가 사랑에 대해 아는게 뭐가 있었나 싶습니다. 그렇지, 철학자들이 정의하고, 문학가들이 설명해주는 것 없이 사랑이 그만한 무게를 가질 수 있었을까? 손에 잡히지 않는, 모두가 다르게 느끼는 사랑.
 
어쩐 종류의 집착, 몰입. 인용한 바, 라캉 마냥 나르시시즘을 넘어 서게 되는 과정에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지.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라는데, 다르고 닮은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는 자아를 토대로 차이를 뛰어넘어 두 사람의 세계를 만드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이건 너무 고차원적인 얘기 아닌가? 말그대로 매혹되고 호감을 느끼는 선을 넘어서, 우리는 어떤 사유를 나눌 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류가 모두 철학자는 아닌데, 어떤 종류의 사랑은 욕망에서 머물고, 어떤 건 아니라고 가를 수 있을까? “시련을 받아들이고, 지속될 것을 약속하며,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의 경험을 수용해나가는 모든 사람은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차이에 관한 새로운 진리를 생산”(52쪽)한다는데, 모두 그러고 있는 것 맞아?
 

질문만 꼬리를 뭅니다. 문득 피식 웃음이 나는게, 진지하게 사랑을 생각해본 적이 없거나, 너무 오래 되어 까먹은 것 같아요ㅠ 사랑과 결혼에 대한 시대 정의, 본능도 계속 바뀝니다. 알랭 바디우가 예찬한 사랑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평생 탐색하고,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는 울타리입니다.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41쪽)인 거죠. 진리를 향한 탐색이고, 욕구의 궁극이고, 지속가능한 사랑을 얘기하면, 결혼도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 토론 과정에서는 결혼도 두 사람의 링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일종의 ritual 로서 결혼이 역할을 하게 되는거죠. 이혼과 비혼이 늘어나는 가운데 20세기의 낭만적 사랑, 몇 백 년간 결혼으로 묶어놓은 사랑도 그 수명을 다하겠지만. 사랑은 어차피 시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플라톤의 시대에서 사랑은 여성에게는 감히 허용되지 않았죠. 선생님과 제자, 멘토와 멘티가 서로 영혼을 가꾼다는 것은 좋은 말이고. 소년을 탐하며 지혜를 나눠주고, 아름다운 소년은 성장합니다. 어쩌면 대놓고 스폰서 느낌도 있어요.


어린 사람에게는, 그것도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기를 사랑해 주는 쓸 만한 사람을 갖는 것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쓸 만한 소년 애인을 갖는 것보다 더 크게 좋은 어떤 것이있을지 나로서는 말할 수 없거든... 추한 것들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는 열망을 갖는 것을 말하네. 이런 것들 없이는 국가든 개인이든 크고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어 낼 수 없거든. (향연, 71쪽)


남자가 된 후에는 소년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며 본성상 결혼과 애 만드는 일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다만 그러도록 법에 의해 강제될 뿐이네... 누구나 자신의 저 반쪽 자체와 만날 때면 친애와 친근함과 사랑에 놀라울 정도로 압도되어, 이를테면 잠깐 동안도 서로에게서 떨어져 있고 싶어 하지 않게 된다네. (향연, 102쪽)


결혼과 종족번식조차, 그저 강제되는 것일 뿐, 사랑은 완전 다른 것이라는 주장. 그런데 저것이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있나요? 사랑이 대체 뭔데요. 토론 과정에서 갑자기 단테의 사랑이 떠올랐습니다. 오로지 신을 이야기하며, 인간을 잊었던 천년의 중세. 그 암흑시대를 끝내버린건, 인간으로 눈을 돌린 단테의 <신곡>이었다고요.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이 좌절된 이후, 그녀를 영원한 존재로 남긴 게 <신곡>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영감의 원천이 사랑, 돌체(Dolce), 달콤함, 향기로운, 사랑에 빠지고 마는 그 느낌. 베아트리체를 생각하는 두근거림. 돌체의 힘으로 중세를 장례지낸 단테를 생각하면, 사랑은 또 다르게 다가옵니다.

 

사랑의 절차는 난폭한 물음, 견디기 힘든 고통, 우리가 극복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이별 따위를 동반.. 사랑의 절차는 주체적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들 가운데 하나(71쪽)이기도 한데, 위험 부담이 없는 사랑보다야, 그런 고통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낸 단테, 사랑을 비극적 서사로 정의해버린 셰익스피어.. 그렇게 우리는 알듯 모를듯 사랑을 정의하고 몰입합니다. 뇌의 호르몬 작용으로서 유효기간 얼마라는 사랑, 혹은 그저 나를 투사하는 상대로서 사랑이라는 착각, 그저 집착같은 모든 감정을 사랑이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 철학자가 이렇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문학 작품이 사랑을 그려주지 않았다면 저는 갈피를 잡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불가능한 무엇처럼 나타나게 만드는 무언가를 극복하는 것. 존재할 이유를 갖지 않았던 무엇. 무엇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클로델 방식의 정의, 사랑은 하나의 사유이고, 육체이며 욕망이자 감정의 움직임이라는 포르투갈 시인 페소아 방식의 사랑 이야기 모두 솔깃한 이야기입니다.


뜬금 없이 <온더무브>에서 올리버 색스의 삶에서 사랑의 궁극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열정으로 가득한 삶, 지적인 열락을 나누는 인생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정리했었는데..온전히 몰입해서 불태워버리는 과정이 사랑이 아니랄 수 있나요. 우정과 연대는 어떻게 사랑이 아니죠? 성관계 여부가 단순히 기준이 될 수 있나요? 이 어려운 질문은, 실존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 궁극의 진리 탐구라고 해버리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만들며 성장하는 삶을 더 아름답게 그리기 어렵다는 생각도 들어요. 시대는 물론, 사회적 맥락에서 천 개의 정의가 가능한 사랑을 얕보면 안되겠다 싶기도 하고요. 인생, 남는 건 사랑 뿐이라는 얘기도 어디서 들은거 같은데...


매거진의 이전글 <내게 무해한 사람> 서늘하고 아픈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