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명수님이 페북에서 이 분을 몇 번 언급하셨습니다. 곧잘 눈에 들어오던 이름이긴 한데, 각별하게 다가오는 그런 순간이 있잖아요. 누이가 배추적을 부쳐주며, 독후감을 대신했다는 에피소드에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오래 별렀지만, 바쁜 일들은 오죽 많아아죠. 더 늦출 수 없다는 생각에 책을 펼쳤습니다. 2주 전 주말에 순식간에 완독. 한 밤에 도저히 놓을 수가 없더군요. 마음이 좁아지고, 한숨이 깊어지는 시간이 있었다면, 단숨에 치유되는 기분에 푹 빠졌습니다.
금방 다진 마늘을 넣은 시금치 무침... 일단 늙기만 하면 호박은 곡식과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채소가 곡물의 단계로 격상한 것이니 그건 단연 시간의 힘이었다. 긴 시간 땅기운을 빨아들였기에 품은 기운이 야물었고 저장이 가능했고 끼니가 될 수 있었다. .. 할매들은 커다란 늙은 호박을 가마솥에 뜨끈하게 삶아서 숟가락으로 얄미얄미 퍼 드셨다. (61쪽) 꽃향이 코로 맡는 종류라면 냉이향은 피부로 맡은 종류다..땅의 정기를 물질화한 것이 바로 냉이다. 냉이의 향은 대지의 비밀스런 뜻이고 본질이다. (73쪽)
'조선 엄마의 레시피'. 부제에도 혹했습니다. 요리 관심자로서 당연합니다. 상상하던 레시피는 아니었습니다. '금방 다진 마늘을 넣은 시금치 무침'이란 표현만으로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데 읽는 동안 내내 레시피가 심장으로 전해지더군요. 도무지 참을 수 없어서 시금치 무침을 곧바로 했습니다. '대지의 비밀스런 뜻이고 본질'이라는 냉이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손질 많이 필요한 나물은 잘 안하는데, 이날 넷플릭스 영화 '로마'를 보면서, 1시간 동안 냉이를 다듬었고.. 밤 1시쯤 냉이무침을 완성했습니다. 서령님의 레시피는, 온 몸을 흔들어대는 힘이 세요.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어요. 읽고 있노라면, 고추를 사야겠고, 마늘을 까고 찧고, 오이를.. 가지를, 파를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썩거립니다. 이런 레시피라니.
고추를 손바닥으로 비벼보고 냄새 맡고 마늘을 까고 찧고 오이를 분지르고 가지와 파를 결대로 찢고 늙은 호박 껍질을 닳은 숟가락으로 벗기고 양파와 토마토의 단면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며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맵고 짜고 달고 쓰고 신맛을 혀끝에 올려놓고 전율할 때 인간은 우주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30쪽)
글이 맑고 단정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마음이 어떻게 전하는 것인지. 펄펄 살아 날뛰며, 그가 눈으로 본 이미지를 순식간에 이식해주는 글이란 무엇인지, 이런게 어떻게 가능하더라? 싶은 글을 만났습니다.
배추적은 깊은 맛. "혀에서만 단, 달게 먹고 난 후에 조금 민망해지는, 어쩌면 살짝 '죄'의 냄새가 깃든! 식욕이되 성욕과도 흡사하게 허망하고 말초적인" 얕은 맛과 달리 "먹고 나서 전혀 죄스럽지 않다. 빈 접시가 부끄러울 리도 없다. 양념장이 없으면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밍밍한 맛" (16쪽)
아픔은 사람을 사무치게 만든다. 그리고 사무침은 사람을 의연하게 만든다.. 생속의 반대말은 썩은속이었다. 속이 썩어야 세상에 관대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속이 썩은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먹는 것이 배추적이었다" (17쪽)
얕은 맛이 아니라, 깊은 맛을 묘사하는 그의 글을 따라 제 마음도 붕붕 날아갑니다. 글만 잘 쓰는 사람의 글이 아니란게 더 기가 막히죠. '조선 엄마의 레시피'는 '레시피'가 아니라 '조선 엄마'에도 방점이 있더군요. 생속의 반대말, 썩은 속. 속이 썩어야 세상에 관대해진다는 말을 감히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에피소드를 읽다보면, 그들의 속이 아득하게 다가옵니다. 그 시절 그녀들의 썩은속들.
시어른 돌아가셨을 때 고모 나이 77세셨다. 스무 살 새댁이 비린 것, 누린 것, 익힌 나물, 생나물을 도토리깍정이 같은 그릇에 일일이 뚜껑 씌워 칠첩반상 격식 갖춰 지어 바치는 동안 세월은 거짓말처럼 흘러가버렸고 고모는 사장어른 영정 앞에 엎드려 비로소 몹시 우셨다. 아이가 죽었을 때도 남편이 사라졌을 때도 경황이 없어 울지 못했던 울음을 비로소 마음껏 우셨다. "야야 살아보니 인생이 참 허쁘다" (87쪽)
그녀의 고향은 안동. 유교의 예가 모두의 삶은 물론, 공기에 깊게 깔려 있습니다. 남편 잃은 스무 살 새댁이 57년간 시어른들 뒷바라지를, 삼시세끼 칠첩반상 차려내는 평생을 보내는게 상상이 됩니까. 그녀 가족과 친지들 이야기에 당혹스러움이 이어집니다. 근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뿐, 버럭 할 수 없었어요. 정직하고 고귀한 생애 앞에서 겸허해질 수 밖에 없잖아요. 인생 참 허쁘다, 그런거죠. 허쁘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단어인데, 그냥 느낌만 알듯 모를듯 합니다. 이 책에는 사투리에 익숙치 않은 제게 외국어 수준의 단어가 꽤 등장하는데,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느낌은 단어가 아니라 맥락에서 전해집니다. 내 식대로 해석한다고 해서, 뭐라 나무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투리는 다 정이 가는데, 그녀가 웃으며 전한 에피소드. 외할배의 언어. 상미賞味하게(맛 좀 보라는 거죠?) 이식梨食 하시게, 배를 드시라는 건데ㅎㅎ 아니 이 양반들은 정말ㅎㅎ)
속이 썩은 이들의 삶은 고단하고 어렵습니다. 한데, 그녀의 설명을 따라가보면, 몰입하는 생이 아름다고, 순간이 반짝 반짝 빛나는 거다, 싶습니다.
1936년, 백석은 십 전 하나에 뼘가웃 되는 가자미 여섯 마리를 샀다고 한 신문 칼럼에다 쓴다.. 내 알량한 상상력은 일제강점과 가난, 그런 단어만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그 시공간에도 예민하게 오감을 열어놓고 바람 살랑살랑 부는 거리를 경쾌하게 걸어가는 발걸음들이 왜 없었으랴. (94쪽)
예민하게 오감을 열고,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하는 삶.
형태가 드러나지 않을 만큼 결이 고와야 하지만 젓가락으로 집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혀 위에서 녹아들어야 하지만 가루가 돼서는 안 된다. 짜지 않아야 하지만 싱거워도 안 된다. 고소한 향이 풍겨야 하지만 기름기가 입에 걸려서도 안 된다. 그게 보푸름이 앉아 있어야 할 정밀한 좌표였고, 그 지점을 가장 섬세하게 맞출 줄 아는 사람이 엄마였다. (108쪽)
명태 보푸름 하나에 자존심과 열정이 고스란히 내려앉습니다. 그거 하나가 아니라, 그냥 삶에 대한 예의. 보푸름도 우주의 한 부분인거죠. 보푸름도 한 번 해보고 싶은데 말임다ㅠ
그녀의 글을 따라, 그 레시피를 따라 달려가봅니다. 얼마나 황홀한지 모릅니다.
그 맛 속에 별의별 것이 담겨 있었던 것만 같다. 무와 콩을 길러낸 척박한 땅에 비치던 은은한 햇볕과, 땅속 깊이 인색하나 달디 달게 숨어 있던 지하수와, 눈물이 돌 것 같은 겸허와, 수도승같이 맑은 인내와, 텅 빈 밭이랑 위로 불어오는 바람결 같은 가난과, 그 가난과 짝을 이룬 꼿꼿한 자부와 자존심이 슴슴한 익지 맛 안에 모조리 담겨 있었던 것만 같다. (121)
무를 나박나박 썰어 살짝 쪄내고, 간장과 파, 마늘과 깨소금과 고운 고춧가루를 넣어 가볍게 무친 후에 참기름 한 방울.. 심심하고 덤덤해서 양반 음식 중에 상양반 음식이라는 설명. 가난과 짝을 이룬 꼿꼿한 자부와 자존심이 담겼다는데 말입니다... 어휴...
햇장..아무런 기술도 양념도 필요치 않았다. 발효한 콩 안에 깊이 스몄던 대지의 정精이 부뚜막의 높은 온도로 저항 없이 딸려 나온 것일 뿐. 땅속 깊이 숨어 있다 치솟는 봄의 우물물이 겨우내 천천히 발효한 메주를 만나 그 달뜬 숨결을 가쁘게 토해낸 것일 뿐! 햇장은 흡사 봄에 부는 바람결이었다. 묵은 매화 등걸에서 막 개화한 매화송이였다. 그런 아취를 가진 장이었다. 햇장은 아직 된장이 되기 이전의 어린 장이다. 된장처럼 진한 장이 아니었다. 하늘이 비칠 만큼 맑았고 슴슴하고 아련했다. (151)
그러나 나는 지금, 이런 장이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짜지 않지만 간이 맞고 달지 않지만 들큰하고 맵지 않지만 알싸한 이런 장이, 슴슴하고 덤덤하고 쿰쿰하고 은은한 장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을 증언이라도 해야 할 임무가 있다고 느낀다. 집장은 콩으로만 만드는 장이 아니다. 콩으로만 만드는 된장보다 훨씬 사치스럽다. 콩과 보리와 쌀이 다 들어간다. (210)
깔끔한 것, 해말간 것, 투명한 것, 무언지 얄팍한 것, 은근히 냉정한 것, 그리고 살짝 인색한 것, 그것이 내가 직면한 서울적인 것이었다. 서울식혜는 딱 거기 적당한 음료였다. 내가 아는 수더분한 것, 두툼한 것, 실팍한 것, 깊이 가늠이 잘 안되는 것, 괜히 내용물이 그득한 것, 실없이 뜨끈한 온기가 감도는 것, 그런 것은 촌스러운 것이었다. 안동에서 먹던 감주와 식혜는 바로 그런 촌스러운 성분들을 잔뜩 함유하고 있었다. (221)
한 때, 은퇴하면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가 장 담그기였어요. 내 대에서 김치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할 것만 같은데, 장은 오죽하랴. 와중에 로망은 있는거죠. 김치도 미국에서 1년 지낼 때, 해보니까 되더라고요. 장이라고 못할까 했는데..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장을 담그겠다는 욕망이 불타오르는 동시에, 저 고결한 일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싶은 긴장을 함께 느낍니다. 언젠가 하게 되더라도, 엄청난 도전이 될게 분명합니다.
정성은 사랑의 실천 강령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인 애정을 눈 앞에 구체화하는 방법이다.. 정성 불변의 법칙. 사람이 누군가에게 들인 정성은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주 공간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믿음.. 그 정성이 일상으로 구현되는 것이 음식이고 그 음식의 본질은 기본이 바로 장이다. 장을 담기 위해 메주를 디딜 때 엄마가 얼마나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고수했는지. 어린 나는 아랫목에 등을 기대고 짜증스럽게(세상에~) 지켜봤다. 엄마는 우선 흰 수건을 머리에 둘러쓰고 그 한 귀퉁이를 입에 물었다. 함부로 말을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침이 튈까봐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흐트러질까봐 하는 경계였다. (145-146쪽).. 생각해보면, 안동의 옛사람들을 지배하던 유교 정신의 본질은 경敬이었다. 우주 만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정성을 다하려는 마음가짐이었다.
입도 뻥긋 않고, 그 의식에 집중하기 위해 흰 수건 자락을 입에 물고, 메주를 밟다니요.... 이게 경敬이라면, 이젠 유교 정신의 본질을 새삼 다시 보겠습니다. 이쯤에서, 안동의 양반들은 부인들의 저 마음을 대체 들여다 보기는 한 것이며, 존중한건지 의심스럽기는 합니다만.. 이게 누구 좋으라고 한다기 보다, 그저 마음을 다스리는 그 시절의 예라고 한다면.. 중요한 바깥일보다, 더 경이롭고 훌륭한 성과는 집안일에서 이뤄지지 않았을까 싶기도요. "여자는 맵씨(맵시), 솜씨, 말씨, 맘씨의 네 씨를 갖춰야 부모 흉을 사지 않지만 그 네 씨의 근본은 음식 솜씨니라”하는 말들에 오만 생각이 다 들지만..
아름다운 것은 윤리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인간의 마음을 열리게 만든다는 저자의 말에 머물러 봅니다. 스스로 몸과 마음의 예를 다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그 맛과 멋을 추구한 이들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영혼이 번잡하고, 몸과 마음이 지쳤던 것인지.. 우주의 진리를 담은듯 맑은 글, 단아한 어른들의 아름다운 태도에 겸허해집니다. 저 자신은 그렇게 단정한 사람이 못되는지라, 금사빠 답게 이 책과 사랑에 빠진 티를 팍팍 내면서, 주변 이들에게 책을 선물하는데 열을 올립니다. 2주 전에 저 만난 이들에게 주로 전했죠ㅎㅎ
"이렇게 맑고 슴슴하고 수수하고 의젓하고 살뜰하고 고담하고 소박한 것(국수)을 꿀꺽 삼키는 것"에 환호하는 저자를 따라서, 맑고 슴슴하고 수수하고 의젓하고 살뜰하고 고담하고 소박한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겠노라 가벼운 결심도 해보고.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해야겠다 욕심도 내보고. 스스로 좀 더 맑아지고 싶다는 욕망에 불타다니. 세속적이고 모순적 인간에겐 과한 가르침이다 싶기도 합니다만.. 때로 필요한 건 분명하죠. 우주의 섭리로, 마침 이 계절에, 이 시기에 만나게 된 귀한 책입니다. 영접합니다.
김서령님.. 살아 계실 때 몰라뵈었으나, 이런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에서 그 분들과 배추적을 드시면 좋겠습니다..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