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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ul 14. 2019

<21세기 기본소득> 꼬리를 무는 질문들...논의를 더


EITC에서 기본소득까지 얼마나 먼 걸까요


근로장려금(EITC)? 알쏭달쏭했습니다. 일하는 저소득 가구에 소득세를 돌려주는 형태로 지원금을 준다는 겁니다. EITC가 대폭 확대된다고 했습니다. 올해 지원 대상이 166만 가구에서 334만 가구로, 총 지급액이 1.2조원에서 3.8조원으로 늘어난다고 했습니다. 최대 지급액이 가구당 최대 300만원. 뭔가 좋아보이는데, EITC란 단어가 도무지 와닿지 않았습니다. 홍보를 하려면 좀 알아듣기 쉬워야 하지 않을까? 사실은 개념부터 이해가 안됐습니다. 일단 저는 실제로 목격한 적 없는 제도이기도 하고요. 근데, 그 단어가 이 책에서 왜 나오는 겁니까? 그것도 미국에서 시행되는 ‘근로소득 세액공제’(Earned Income Tax Credit)라고요. 일단 국내 정부 용어와 다르지만, 포드 대통령 시절에 법제화되어, 2013년엔 수령자가 2700만명에 달했다고요. 갑자기 겁나 먼 책 내용이, 현실과 겹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는 177만명. 65세 이상 전체 노인 중 소득과 재산이 적은 70%의 노인에게는 월 30만원 기초연금이 지급됩니다. 청년구직활동지원금은 월 50만원 6개월씩 올해 8만명에게 1500억원 규모로 지원됩니다. 만 6세 이하 모든 아이에겐 아동수당 월 10만원이 있죠. 저도 잘 몰랐는데, 생각보다 복지, 사회안전망이 뭔가 돌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양극화가 심해진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아니 해야 하는 당연한 일들인 거죠. 

제도의 필요성이 아니라 필연을 이해하고 나면, 대체 왜 이리 복잡한가 생각하게 됩니다. 수혜자별로 용어도 다르고, 컨셉도 다르고, 그게 소득별, 연령별로 다 다르고, 내게 해당되는건 어디가서 확인하고 신청해야 하는지. 나는 소득분위 어디쯤에 있는거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 확인해야 하는건지. 어쩌다 이런 제도를 홍보맨 관점에서 보다가, 아무리 좋은 제도도 어려운게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이 중 몇은 좀 단순해지면 안될지. 무엇보다 가장 단순한 기본소득이란 제도가 더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선별과 지급에 드는 비용도 줄텐데... 


필연적 복지의 미래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혹시 정부 차원의 고민이 있냐고 누군가에게 물어본 적 있는데, 아직 아닌거 같습니다. 그렇다고 꿈같은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혁신적 포용국가를 내세운 정부는 저성장과 양극화, 일자리, 저출산고령화 등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해 재정을 적극 운용한다는 구상입니다. EITC가 늘고, 온갖 안전망이 강화되는 것도 그 맥락입니다.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좋은 방법이 현재로서 안 보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복지 지출이 선진국스럽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전 여전히 생각해봅니다. 다 좋은데 너무 복잡해요. 


복지에 대해, 사회적 보호에 대해 우리 사회의 더딘 논의 속도를 이해하기로 한 건, 우리 고민이 얕다는 것을 인정한 이후입니다. 무조건적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18세기 말 유럽에 등장했다고 하는 와중에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노령자를 위한 사회보험을 제안한 건 1881년 일입니다. 뉴질랜드는 기여금 없는 노령연금을 1898년에 시작합니다. 스웨덴이 보편적 국민연금 체계를 도입한건 1913년입니다. 앤서니 앳킨슨의 ‘불평등을 넘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이런 역사를 보면, 우리가 따라가는데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합니다. 우린 2011년 기준 공공과 민간의 사회적 지출이 주요 OECD 국가 중 끝에서 3등이었어요. 


번역자인 홍기빈님은 “기본소득은 일, 노동, 여가, 소득, 가족, 사회, 국가 등에 대해 지난 몇천 년간 인류가 생각하고 믿어왔던 거의 모든 윤리적, 과학적 통념에 근본적으로 모순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요즘 우리 복지 제도들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홍기빈님 말대로 “우리의 기술적, 산업적 조건이 변화.. 기존 통념 안에서는 변화한 현실의 돌파구를 절대로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갈수록 많은 이가 깨닫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시도들이 시행으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누구나 일과 일 이외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꽃 피울 만큼의 진정한 자유가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하며..이런 자유로운 사회는 기본소득을 기둥으로 해서 만들어진다”아마티아 센 님의 자유도 떠오르지만, 방향에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일찌감치 기본소득에 대해 관심 많은 1인이었습니다. 또 소비자의 지속가능성이랄까, 저소득층도 쇼핑몰에 가서 소비를 해줘야만 하기 때문에, 자본의 이익에 따라 기본소득이 필연적이라는 주장에 예전부터 공감했습니다.

실행 단계에서 불거질 문제들

다만, 그런데, 음,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온갖 회의가 겁나게 밀려들었다는 점은 고백해둡니다. 생존이 보장된다면, 성장이나 상대적 혹은 절대적 부를 지향하는 엘리트들 외에, 평범한 다수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한해 고층건물 신축공사장에서 추락사 하는 노동자가 300명에 달한다는 김훈 선생의 칼럼. 믿기지 않는 환경에서 희생된 고 김용균씨 사연. 그런 일은 그 시대에 누가 하게 될까요. 당연히 노동 여건이 개선되겠지만, 그 비용은 누구 부담으로 돌아갈까요. 

선량하고 올바른 정책이 실제 집행될 때 등장하는 부수적 효과들은 어떤게 있을까요. 기계화 자동화로 해결되지 않는 영역들은 어찌 될까요. 노동은 더 존중받을까요 혹은 더 무시당할까요. “사람들이 일자리를 잡는다고 해도 보편적 수당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나온다면 사람들은 자기를 헐값으로 노동시장에 팔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헐값 노동은 과연 없어질까요. 노동시장에도 국경이 없어지는데, 기본소득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 노동자들의 흐름은 어찌 될까요. 그리고, 복지 논의를 100년 이상 해온 나라들, 기본소득 얘기한지 오래된 나라들은 왜 아직 본격 도입을 못하고 있는 걸까요.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가, 그리고

제6장의 제목입니다. "탄소세를 도입한 미국의 경우 그 세수로 충당할 수 있는 기본소득 수준은 1인당 GDP의 0.7~2%로 추산된다"고요. "세계 유일의 지속적이고 진정한 기본소득인 '알래스카 영구펀드'는 석유 판 돈이 기본인데, 21세기 들어 지금까지 조달액수는 연간 평균 1200달러 정도. 역시 알래스카 국민 1인당 GDP의 2%" 입니다. 96년 이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체로키족 동부연맹은 보호구역 내 카지노 이윤을 분배합니다. 90년대엔 평균 연 4000달러에서, 2015년엔 연 1만 달러에 근접한 것으로 예상된다고요. GDP의 25%에 가깝다고 합니다. 주민 60만의 카지노 도시 마카오는 해마다 특별법에 의해 지급 액수와 방법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온라인 거래에 대한 세금인 '슈퍼 토빈세'라는 것도 나오는군요. 즉 재원 마련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는, 아마 향후 로봇세 등도 이쪽으로 얘기되지 않겠습니까...

좀 더 진지해진다면, 기본소득 실험들도 계속 봐야겠습니다. 책도 이게 가능할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떻게 될지 여러 사례들을 살펴보지만, 실제 현재진행형 실험들이 있으니까요. 보도에 따르면, 핀란드는 17~18년 2년간 20대 장기실업자 2000명에게 매달 560유로를 지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본소득이 근로의욕을 떨어뜨리지는 않더라는, 구직활동은 줄지 않더라는 결과가 나왔다고요. 캐나다 온타리오 주정부의 기본소득 실험은 결국 예산 부족에다 주 정부 교체로 중단됐다고요. 이게 정부가 바뀔 때마다 안정성이 떨어진다면 문제가 될 수 밖에요.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가 반대로 끝난건..  기존 복지 제도를 없애는 대신 기본소득 도입을 물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더군요. 이건 질문이 잘못된게 아니라, 기존 복지 대체 여부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안된 상황이란 걸 보여줍니다. 

공감대가 어디까지.. 


공감대가 형성 안된 건.. 사실 여러 요소입니다.. 결과가 불확실하다는 것 외에 윤리적으로도 반감이 적지 않을 수 밖에요. "노동 능력이 있는 사람이 타인의 노동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널리 받아들여진 정의의 관념에 정면으로 위배... 게으른 자들이 근면한 이들을 착취하는 비법이라고 볼 것" - 존 엘스터 (398쪽).. 이건 요즘 우리 사회의 '공정성 감각'에도 안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남보다 더 공부해서 학력 스펙을 갖추고, 어려운 시험을 쳤으니 우대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빈곤과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지원조차 반대하는 것으로 이어질 거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논의는 적잖게 필요할듯요. 
"안정적 고용과 괜찮은 급여를 받는 전일제 남성 노동자가 핵심인 노조도 기본소득에 소극적"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결국은 밥그릇 문제. 떡을 나누기 싫어하는 기득권층과 생존이 위협당하는 계층의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유권자의 선택 이슈이기도 합니다. 책에 따르면 덴마크의 94년 조사에서는 40%, 2002년 핀란드 조사는 63%, 2015년 프랑스에서는 60%가 기본소득에 긍정적인데, 2011년 미국의 1000명 조사는 반대가 82%였다고 합니다. 질문지 자체의 문제도 지적되는데 미국은 '일하기를 선택하는 것과 무관하게, 누구나 빠듯할 정도의 기본소득'을 물었던 반면.. 질문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는 거죠. 틈을 확 벌리는 질문의 미세한 차이란 게 있다면, 그걸 조율하는 것도 큰 과제로 보입니다. 


이 책은 #트레바리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3시간의 토론은 상당히 유익했고, 결론적으로 제게는 충격적이었어요.. 기본소득 진영의 온갖 논리를 총정리한 이 책을 읽고, 다수가 끝내 기본소득에 반대했거든요.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제 눈에는 나름 지적인 분들의 결론이 이렇다는 것은, 기본소득 진영의 설득이 여전히 약하다는 반증으로 보입니다. '민주적 정부가 충분히 공정하고 효율적이며 신뢰할 만한 방식으로 세금을 거두어 분배할 수 있다는 믿음'만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결국 공감과 합의, 아직 멀었다 싶지만.. 최소한 이런 논의 정도는 계속 가져갔으면 합니다. 몇 달 지난 책이라 가물가물한데, 끝내 기록을 남기는 이유도 그런 목적 때문이라고 해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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