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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May 03. 2020

<스피닝>전부였던 세계를 버려도 될까, 좋아하긴 한걸까


‘다른 여자애들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나보다 훨씬 어른 같았다.’

부족한 나, 문제 있는 나를 들키면 어쩌지? 열심히 사는 소녀에게는 그런 불안이 있을지도 몰라요.


12 동안 스케이트 선수로 살아왔던 틸리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새벽4시에 일어나 차가운 공기가 얼얼한   링크로 들어가 고요함을 즐겼던 어린 소녀.

현실에서 나를 알아주고, 온전히 집중해주는 그런 다정함은  없어요. 때로 시기하고 때로 무시하고, 감정을 불규칙하게 드러내는 또래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어려운 과제여요. 게다가 일찌감치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알아버린 소녀. 어쩌면 세상과 어울리는게 가장 난이도 높은 미션입니다. 차라리 악셀, 스파이럴, 점프, 스피닝 같은 피겨스케이팅의 기술을 익히는게  정직한 반응을 얻는 길이죠. 긴장과 불안으로 신경이 곤두서도 이겼다는 성취도 가끔 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스케이트를 좋아했을까요? 따뜻하게 바라봐주던 선생님의 눈길을 좋아한게 아녔을까요? 극한의 규칙을 지키면서 나를 칭찬할 뭔가를 좋아한게 아녔을까요?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티격태격해도 함께 하는 위안을 좋아한게 아녔을까요?


대체 내가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하다니, 어른에게도 힘든 과제죠. 틸리에게 12년 동안 전부였던 스케이트. 어쩌면 정말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랑도 변하는 마당에.. 답을 찾는 길이 성장이라지만 모든게 무겁고, 도망치고 싶을 뿐이어요. 도망치는 결단 조차 사실 몹시 용감한 일이죠. 96년생 틸리 월든은 어떻게든 그 터널을 빠져나왔고요. 자전적 이야기 <스피닝>으로 2018년 미국 만화계의 권위있는 상이라는 아이스너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작가의 말을 읽는데 마음이 아렸어요. 바쁜 엄마 없이 훈련과 대회를 다녔던 그는 시끄럽고 대단했던 다른 엄마들에 대한 기억, 아이들 스케이트의 지저분한 그 세계를 폭로하겠다는 각오가 있었던 모양인데, 서사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스케이트 이야기인데 ‘링크 바깥의 삶이 스케이트 타는 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깨달은거죠. 그는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 질문의 답을 결정했다’고 하는데, 소녀가 성장하는 얘기가 그리 간단할 리 없습니다. 답을 구할 문제도 아니고요.


기억도 거의 나지 않는 나의 10대를 잠시 생각하고,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바쁜 엄마의 부재를 어떤 방식으로든 통과했을 딸의 10대를 생각하고, 우리의 국민영웅 김연아 선수의 10대를 생각했어요. 어떤 열정으로 삶을 꾸려가든, 혹은 열정 없는 삶을 탄식하든 누구나 외로움을 버텨나가는 시간을 살지 않나요. 틸리가 레이, 그리고 린지 언니와 쌓는 시간들이 참 고맙더군요. 차가운 공기에 적응하기 위해 추운 안식조차 받아들였던 저자의 서늘한 숨결. 외롭고 불안했던 소녀 시절을 담담히 그리는 과정에서 틸리가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았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휴일 가볍게 집어들었으나 여운이 깊은 성장기록. 무튼 12년간 스케이트 선수로 살았던 그는 대학에 갈까 공부도 하고, 첼로도 배우고, 미술도 해보고, 결국 만화가가 됐습니다. 아직 20대 작가님, 꿈꾸는 사람은 다르게 진화합니다. 하고 싶은거 다하세요. (쓰면서 멈칫. 애들에게 난 정작 저 말을 못해주고, 뭔가 말리기도 하고 그러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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