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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Sep 07. 2020

<미세스 아메리카>성실하고 탁월했던 반페미니즘 선동가

그녀, 필리스 슐래플리 Phyllis Schlafly

정치학을 공부했고,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 성실하게 필사적으로 살아온 여성. "차별받은 적 없다"고 하지만, 1970년 정계에 그녀를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몰입했던 바. 페미니즘과 낙태 합법화에 맞서 싸운 운동가이자, 당대 여성운동가들의 염원이던 성평등 헌법수정안(ERA)을 막는데 성공한 인물입니다.
실존 인물로도 흥미로운데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하면서 무시무시한 캐릭터의 힘이 실립니다. 에미상 후보라는데, 무슨 상이든 다 주고 싶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연기네요.

필리스는 "능력 없는 여자들이나 차별을 핑계삼는다"고 주장하는 잘난 인물. 그러나 덜 똑똑한 남자들 틈에서 서기 취급을 받거나 노골적 추파 혹은 '꽃' 같은 대우를 받을 뿐입니다. 안보 전문가이지만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찾지 못하죠.


별 관심 없던 여성 이슈로 눈을 돌리는 과정, 출마를 포기하는 과정 등은 그의 동물적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줍니다. 보는 내내 필리스는 너무 대단하다는 감탄 밖에 안나와요... 워싱턴대학 졸업한 것만 나왔는데, 찾아보니 래드클리프 석사. 그리고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아요..(드라마를 보셔야)

애국주의와 반공주의, 반페미니즘의 화신. 그는 보수 내에서도 극단적이었는데, 그게 힘이 될 때도 있고 독이 될 때도 있습니다. 당연하죠.. 무튼 글로리아가 'Ms'라는 잡지를 만든건 알았어도 '미즈'라는 단어의 함의는 사실 잘 몰랐던 것 같아요. 필리스는 끊임없이 '나는 미세스' 라면서, '미스'라는 호칭에 '루저'의 느낌을 담았던 그 시대를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여섯 아이 키운 전업주부로서 필리스의 그 자부심은 사실 여성을 옥죄는 '고정관념'으로서 역사가 무척 길죠. 주부에 대한 평가는 그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바뀌어야 하거늘.


탁월한 선동가의 힘

성평등을 보다 분명하게 헌법에 명시하려는 ERA(Equal Rights Amendment). 71~72년 하원과 상원을 통과해 미국 연방의 4분의 3, 38개 주 의회에서 비준을 승인하면 효력이 발생하는 상태였죠. 필리스는 ERA에 대한 흑색선전에 나섭니다. ERA가 통과되면 (베트남전으로 반전 여론이 높아진 상황에서) 여자가 군대를 가야 한다, 이혼수당, 양육수당 못받는다. 화장실이 남녀공용이 된다.. Stop Taking Our Privileges, 내 특권을 빼앗지 말라는 구호가 등장합니다. 군면제 등 미국 여성의 특권, 전업주부의 특권을 빼앗지 말라는 겁니다.

근거 없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공. 가짜뉴스도 저 정도 선동 능력이면 통하는구나, 놀라울 따름입니다. 소련의 핵 위협을 얘기하던 그는 여성해방운동이라는 위협이 미국의 전통 가정을 위협한다고 공포 마케팅을 제대로 합니다. 전업주부에 대해 문제가 있다, 멍청하고 못 깨우쳤다고 한다 는 식으로 편을 가르는 것은 기본. 여성해방운동은 기본적으로 인생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본다며 전업주부의 긍정적 태도에 자긍심을 갖도록 합니다.
특히 여자는 집안 대소사를 책임지는 사람인데, 억지로 일터로 내몰면, 여자가 해야 할 일이 두 배로 늘어난다, 피로에 찌들어 행복하지 못하고, 어느 쪽 일도 잘 안될거다, 결국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할 것이다, 여성해방론자들이 그걸 노린 것일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2020년 여성으로서 필리스의 '어떤 탁견'에 감탄할 수 밖에요......


전업주부들의 피해의식과 불안함을 깨우고, 그들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식. 덕분에 엄청난 열정으로 'STOP ERA' 운동에 나서는 주부들을 보면, 이게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구나 깨달음이 옵니다. 이 주부들은 아이 일찍 재운뒤 미친 듯이 헌신해요. 필리스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만들어냈습니다. 방법과 방향에 동의할 수 없을 뿐, 제도권에 들어가지 못한 그녀의 정치력은 실상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빵 에피소드는 정말 소오름..)


또 다른 여성들의 싸움

필리스가 압도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9편 에피소드의 다른 주인공들이 미국의 여성운동사 주역들입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로즈 번)이 단연 2편 주인공. (치어리더 평도 있었다니ㅠ) 셜리 치좀(우조 아두바)은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하원의원이었고, 1972년 흑인 최초로 미국 대선에 민주당 경선 후보로 출마했던 인물이랍니다. 그녀가 겪는 일들은 예측가능한 수순인데 참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요. 베티 프리단(트레이시 울먼)은 사실 이름만 들어봤는데, 결국 토대를 만들었던 그녀가 그 전투력 때문에 당하는 일들을 보면 맘 아프고요. 비슷한 느낌을 벨라 애브저그(마고 마틴데일)에게서도 받다가, 결국 그녀가 해내는 일, 겪는 일을 보면 그 자체가 리더십 공부. 그녀들의 연대가 굉장히 강력한 형태로 한 번 딱 나오는데,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구나 욕심이 무럭무럭 자라네요..


필리스의 투쟁은 매번 경이로운 수준인 반면 이들의 싸움은 종종 아쉽습니다. 저렇게 나이브해서 될까 싶을 때가 있고, 이래서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소리를 듣는구나 싶어요. 필리스는 깃발 들면 누구도 뭐라 않고 '조직'되어 움직이는데, 글로리아와 벨라, 베티는 디테일에서 싸우느라 바쁩니다. 근데 사실 디테일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여성 인권을 위한 싸움, 성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성소수자는 또 어찌할거냐, 중도를 포섭할거냐 말거냐.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싸움은 '이상적 지향점' 외에도 '전략적 타협선'까지 고민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 사이에 지쳐 떨어지거나, 실망하고 다투고.. 이들은 가끔 오합지졸 같고, 지나치게 감정적이라 일을 그르칩니다. 오죽하면 필리스가 "나의 우군은. 페미니스트들"이라고 하겠습니까.. 필리스를 키워준 것도 사실 그녀들이죠...(이 부분에서는 정말 땅을 치며 봤다니까요..) 이 똑똑한 온니들은 필리스를 무시하다가 매번 힘든 고비를 맞이해요..필리스는 거의 매순간 전략적이고요. (그 똑똑한 필리스가 몇 번 무너지는 모습이 또 압권... )

그래도 이 온니들의 연대, 지치지 않는 열정이 만들어내는 장면들에서 울컥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승리를 쌓으며 가부장제 사회에 균열을 내는 과정은 쉽지 않아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튼 훌륭한 온니들의 얼굴 틈에, 이 작품에 드문 가상인물 앨리스(사라 폴슨)가 들어있습니다. 실존 인물이 아닌 탓인지 그녀의 일화인 8편의 제목은 앨리스가 아니라 휴스턴. 그녀가 겪는 상황을 거의 공포 영화처럼 함께 긴장하고 봤습니다. 그녀는 존재 자체가 저같은 사람에게 실마리가 되는 인물입니다. 제작진이 어떤 마음으로 사라 폴슨이라는 인물을 끌고 갔을까, 이 작품에서 꽤 고마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 드라마는 미국의 역사와 정치를 제대로 공부하게 해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너무 드라마 같은데 실제 역사가 그랬던거죠. 게다가 저는 이 드라마를 친구 ㅈㅂ과 함께 정주행했습니다. 마침 미국사 교수인 ㅈㅂ의 해설을 들으면서 보다니 정말 이게 웬 복입니까. 1970년대 미국을 이해하려면 1960년대부터 봐야 합니다. 제가 배리 골드워터를 다시 학습하다니.. #힘의역전 메디치포럼에서 천관율 시사인 기자가 유권자 지형이 완전히 흔들리는 '리얼라인먼트'라는 주제를 꺼냈을 때 처음 들어본 인물. 리얼라인먼트 대표적인게 대공황 무렵, 그리고 1960년대 배리 골드워터가 만들어낸 겁니다. 그는 1964년 공화당 후보였어요. 비록 낙선했지만 미국 유권자 지형을 바꿨죠. 1963년 케네디 암살 당시 부통령이던 존슨은 진보적인 동시에 케네디 형제에 비해 직진형이었나봐요. 흑인 인권 보호에 나선 존슨을 남부는 참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중서부나 남부가 돌아설 걸 알면서도 직진했던 정치가라니..


흑인 차별을 금지하라는 것이 그렇게 선을 넘는 일이었을까요. 이후 미국은 1960~1970년대 같은 진보의 전성기를 누리지 못합니다. 민주당 정부 역시 중도 성향이었죠. 어찌보면 소수자 차별을 금지하고, 낙태 같은 여성 인권 보호를 강화하는데 수십 년이 걸렸고, 아직도 진행중이어요. 미국의 여성 운동도 1970년대 이 드라마가 보여준 전성기를 누린 뒤 오히려 후퇴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인권 아젠다가 미국 보통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치는 일은 트럼프 정부에서도 계속 목격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와 다르지 않아요. 필리스가 주도한 문제의 집회 장면에서 ㅈㅂ이 외쳤어요. 아니, 저기서 남부연합기가 나오다니! 저야, 알아보지도 못했지만 미국에서는 정말 민감한 문제. 위인전에 나오는대로 링컨 대통령이 다 해결한줄 알았지만, 우리는 #blacklivesmatter 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더디게 움직이는구나 하나 더. ERA는 필리스의 반대에 부딪쳐 어찌 됐을까요..이거 다 스포일러! 그러나 이거 다 역사적 사실입니다요... 보는 재미를 해치지는 않아요. 더 열불날뿐.



ERA 초안은 사실 1923년에 나왔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뒤) 1972년에야 연방의회 통과 후 38개 주 비준이 필요했는데, 필리스의 활약 덕분에 카터 대통령의 기한 연장에도 불구 실패했어요. 미투 열풍에 힘입어 다시 관심을 받아서 36번째 네바다주가 비준한게 2017년입니다.. 일리노이주가 2018년에 비준했고요, 2020년 1월 버지니아주가 가세했는데, 필요조건을 갖췄을 뿐 연방 상원이 다시 복병입니다. ERA가 뭐 그리 대단한게 아니라 그저 헌법에 성평등을 명시하는 건데 말입니다. 그 대단하지 않은, 그러나 상징적인 것으로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게 미국 정치였고, 많은 이들이 기쁨과 슬픔과 분노를 나눴습니다. 필리스 같은 능력 있는 인물이 의지와 돌파력, 실행력까지 갖췄을 때 엄청난 바람을 만들어내고요. 맞서서 또 많은 이들이 연대하며 버텼어요. 어떻게 성공과 실패를 단순하게 말하겠어요. 애써온 이들의 시간이 더디지만 변화를 만들겠죠. 그 변화의 방향을 잘 판단하지 않으면 필리스가 될 수도 있다는게 나름 교훈... 제대로 된 정보를 토대로 계속 성찰하는 수 밖에 없더라고요.


정치적 이슈를 소재로 삼았지만 엄청 재미있고, 끊임없이 감탄하고, 슬프고 웃기고..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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