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진지하게 '수필'을 쓰겠노라 작심했으니, 찰스 램의 '구운 돼지에 대한 고찰' 덕분이었습니다. 돼지고기에 대한 예찬을 온갖 구라 섞어 풀어냈는데 어린 마음에도 홀딱 빠졌죠. 나도 저런거 쓰고 싶다, 역시 돼지고기가 최고인데 찰스 램 아재가 선수를 쳤네, 뭘 써보지. 아, 나는 '감자에 대한 고찰'을 써볼 수 있을까? 가장 소박하지만 풍요로운 재료인 감자에 대해 무궁무진하게 얘기를 뽑아낼 수 있겠는걸?
글재주는 알량했고, 인생은 분주했어요. 수필은 못썼죠. 그러나 아주 깊숙이 묻어놓았던 이 기억을 되살린 책을 만났습니다. 진짜로 찰스 램 저 수필로 책을 시작하다니! 와. 송원섭님!
JTBC <양식의 양식> 책임 프로듀서(CP) 원섭님과 '먹방'으로 인연을 맺은지 어느새 10년 되어 갑니다. 서울 시내 만두 맛있는 곳이 어디냐, 먹방 배틀마냥 트윗 주고받다가 만들어진 모임인데 진짜 먹방 좋아하는 순수한 모임입니다. 재주 많은 원섭님은 글솜씨도 좋은데다 정말 박학다식하여.. 한동안 그 블로그에도 뻔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그 시절 <퀴즈 아카데미> 7주 연속 우승한 장본인이라, 그냥 모르는게 없는 옵바 정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식도락을 즐긴 부친 덕분에 국민학생일 때 해운대 암소갈비와 대전 한밭식당, 속초의 단천면옥을 전국구 맛집으로 꼽았고, 의장부 평양면옥과 종로 한일관 냉면의 육수 차이를 논하며 자랐다'는 이 책 저자 소개를 보고, 아, 이 분은 찐이구나.. 뒤늦게 알았네요. '맨스플레인' 마냥 평냉 놓고 '면스플레인'을 서로 시전하는 먹방 멤버이지만 그 중에서도 원섭님의 까칠한 비평은 늘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죠. 일단 오래 묵은 내공인겁니다.
그런데 이 분은 음식만 비평하지 않아요. '지식정보홀릭', 깊게 팝니다. 찰스 램 수필로 시작하여, 한국은 유럽연합(EU), 미국, 중국, 베트남에 이어 세계 5위권의 돼지고기 소비국. 2018년 약 1700만 마리를 도축했는데, 국민 세 사람이 돼지 한 마리씩 먹어치운 수치라거나, 토종 재래종 돼지는 22.5~26.5kg에 불과해 요즘 비육돈(110~120kg)에 비해 무척 작았다거나, 1809년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 보면 저피수정회(豬皮水晶膾)라는, 돼지 껍질을 푹 삶아 뜨거운 두부나 묵처럼 만들어 먹는 음식이 나온다거나, 19세기 말 요리책 <시의전서>에서 비로소 제육구이가 등장한다거나.. 목차 제목이 '2000년간 키워 먹었던 돼지, 그러나 삼겹살을 구워 먹은 기록은 없다?'... 삼겹살은 대체 어떻게 외식계의 지존이 된 것이며.. 와, 이렇게 파고 또 파고.. 그냥, '돼지고기는 맛있다', '돼지고기를 한국인이 좋아한다' 수준이 아닌겁니다. 이 집요함은 돼지고기 먹으러 바비큐 성지 미국 멤피스 축제를 찾아가고, 스페인에서 '이베리코 데 베요타'라는 하몽 중의 하몽을 먹어보고, 세고비야의 새끼 돼지 통구이 '코치니요 아사도'를 먹어보고... 정말 글로 봐도 설레이는 여정입니다ㅠㅠ 저 역시 두 가지 식탐, 食欲, 識欲 많은 인간이라 그런 것인지, 모든게 제 취향인 겁니다.
저도 면스플레인 자제하려고 하지만(하나마나한 소리), 소싯적부터 필동면옥, 을지면옥, 평양면옥, 우래옥, 을밀대를 다니고, 밍밍한 평냉 싫어하던 남친을 전도하여 매니아로 만들고, 기어이 의정부 평양면옥을 찍고, 반포 평양냉면, 신사동 평양면옥 순례를 다니며 육수와 고명을 비교하고, 최근 능라도, 봉피양, 서관면옥에 반한 인간인지라.. 평양냉면 1, 2, 3세대 분석에 마냥 빠져들더군요. 원섭님은 늘 이 방면에서 제가 아는 것보다 10배는 많이 아는 지라.. 고수의 열강을 듣는 기분이랄까요.
방송에서 유현준 교수가 한국이 치킨 강국이 된 배경을 설명하는 장면에 신기했는데, 책은 더 친절합니다. 1970년대 아파트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하고, 통닭, 림스치킨 얘기, 켄터키프라이드치킨 상륙 당시 에피소드 등은 제가 겪은 내용이라 더 솔깃합니다. 그 시절 저는 별생각 없었는데, 켄터키프라이드치킨이 미국 본토 레시피를 쓴 탓에 짠 맛으로 실패한 얘기는 몰랐네요. 어쩐지 매장이 생기다 주춤하더라니.
<양식의 양식> 방송을 보면서, 아니 저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다니! 넘 꽉꽉 채우는거 아닌가 싶도록 알차서 과하게 배부른 느낌이더니... 책은 그걸 차분하게 음미할 기회입니다. 방송을 봤다면 즐거운 복습, 안봤다면 그냥 신세계에 빠져볼 수 있습니다. 사실 백종원쌤을 비롯해 출연진들의 저마다 다른 음식 얘기 펼쳐내는 것도 포인트인데(넘 많이 담은게 문제라니까요) 그걸 책에서 다시 보니 훨씬 좋습니다. 그리고 음식과 문화 얘기잖아요.
설렁탕과 곰탕 구별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잊지 않게 된 것도 감사하지만, 온갖 해장국, 돼지국밥, 수구레국밥, 몸국 등이 마구 땡길 정도로 우리의 국밥을 실컷 탐하다가 해외로 눈을 돌려 국밥을 찾습니다.
풍로 위에 큰 솥이 걸리고 즉석에서 아로스 칼도소를 요리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당장 아침에 잡아온 생선과 조개, 새우 종류가 바로 재료가 된다. 그 자리에서 뚝딱 재료를 손질해 넣고, 육수를 부어 끓이다가 쌀을 넣고 익혀 음식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이 약 30분. 그 주변에서 와인을 마시며 역시 수다에 빠져 있던 아저씨들은 음식이 다 되었다는 말에 우묵한 그릇 하나씩 들고 테이블에 죽 정렬해 앉는다. 셰프(같은 어부다)는 사람마다 듬뿍듬뿍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해물탕 국밥, 아로스 칼도소를 나눠준다.
길고 긴 테이블에 동네 어부 아저씨들이 줄줄이 앉아 똑같은 들통에서 끓인 아로스 칼도소를 나눠 먹었다.. 같이 지켜보던 백종원 대표가 답을 내렸다. "이거 국밥 맞습니다. 확실합니다." (236쪽)
어휴... 저는 이런 글 너무 좋아합니다. 제 식탐이 괜한 거겠어요. 음식을 먹는 것만큼 음식 얘기, 정말 애정합니다. 게다가 이 분은 블로그 세계에서 오랜 공력을 쌓아온 분 답게 '읽히는 글'을 씁니다. 술술 따라가는 재미가 훌륭합니다. 쉽게 읽히는데 정보도 많아. 아, 이거 제가 지향하는 글쟁이인데.. 음.. 앞으로도 겨뤄보도록(흑흑.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식탐에 제대로 빠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워낙 공들여 취재한 덕에 등장 식당에 언제 가볼 수 있을지 배아프고 부럽다는 것. 전세계 누비는 건 포기하더라도.. 파리의 비싼 '브레스 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닭구이 먹으러 전남 화순의 OK목장가든에는 대체 언제 가볼 것이며... 당장 먹어보고픈 음식이 늘어납니다... 젓갈의 세계를 읽다보면, 스페인에 가봐야 할 것 같고ㅠㅠ 일단 또다른 식탐識欲만 채워봅니다. 어우..
저자 사인 보고 흥분하기는 오랜만인데.. <양식의 양식> 저자 송원섭 님의 제안은..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그래도 계속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