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파라거스 머리 부분을 이용한 스프, 버섯을 곁들인 생선구이, 올리브를 곁들인 비둘기구이, 젤리로 굳힌 푸아그라 파테, 송로버섯을 곁들인 안심 숯불구이, 아스파라거스 줄기와 홀란데이즈 소스, 양 넓적다리 구이, 샐러드, 파인애플 아이스크림, 치즈, 디저트 모듬, 커피와 코냑..
1905년 9월19일 대한제국 황실의 연회 메뉴. 독일인 엠마 크뢰벨이 셰프 책임자 '황실찬사'였다고요. 손님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씨. 다음날 오찬 메뉴는 열구자탕(신선로), 골동면(간장비빔국수), 수어증(숭어찜), 편육, 전유어(생선구이), 전복초, 화양적(산적), 후병(두텁떡), 약식, 숙실과, 생리(배), 생률(밤), 포도, 홍시, 정과, 원소병(꿀물 음료), 장침채(간장김치)
고종은 미국 대통령 딸이 나라를 지키는데 도움이 될거라 기대했을거라 하지만, 이미 미국은 그해 7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비밀조약을 맺었던 상태. 정성은 물론, 아낌 없이 투자한 저 연회 메뉴들이 서글픈건 어쩔 수 없네요. 그리고 나라가 망하기 직전, 황실은 저렇게 먹고 살았단 말인가, 당혹스러움도 남고요.
책은 20세기 이후 우리 역사를 음식으로 풀었어요. 문화인류학자 주영하님의 이야기를 따라 역사를 후다닥 흝어본 느낌.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당대의 풍경이 보입니다.
1880년대 조선에 이미 위스키가 들어왔고, 젊은 양반들이 즐겼다는 건 신기하지 않은데, 기생이 위스키 한 잔 먹여주는 저 사진은 놀랍습니다. 마당에 차려진 소반. 위스키 병. 손도 까딱 않고 기생과 술자리를 갖는 그.
위스키는 이후 잠시 사라졌다가 한참 뒤에 들어옵니다. 조상들이 즐긴 음식들은 사라진 것도 많고, 생각보다 최근 들어온 것도 많습니다.
1930년대 인천의 중국 음식점 공화춘의 메뉴판. 커우웨이몐(버섯을 넣은 우동), 지쓰몐(닭살을 실처럼 자른 것을 넣은 우동), 싼셴몐(해삼과 전복류를 넣은 우동), 샤런몐(새우를 넣은 우동), 다루몐(계란을 넣은 우동), 자장몐(미소를 얹은 우동), 간반몐(차가운 우동), 훈툰(돼지고기를 작게 소로 만들어 넣은 우동), 지쓰챠오몐(길게 자른 닭고기를 넣고 볶은 우동).. 설명을 보면, 뭐랄까 저 음식들 다 어디간거지 싶은거죠.
일본의 음식 문화가 끼친 영향은 간장부터 수도 없이 많지만, 일본의 멘타이코(명란젓)가 식민지 조선에서 건너간 음식이란 것도 흥미롭습니다. 조선시대 함경도 사람들이 먹던 어란의 한 종류라고요. 한국 업체가 명란젓을 공식 수출하게 된 건 1960년의 일이지만 말입니다.
일제 시대도, 해방 후에도, 한국전쟁 때에도 먹을게 부족해서 등장한 사연들이 여럿. 밀가루와 메밀가루를 기계로 압착해 만든 인공곡물 '면미'가 등장하고, 1909년 일본인의 시선으로 출간된 <조선만화>에 조선 하층민들이 참외로 끼니를 대신했다는 얘기가 나오고요.. 전쟁 당시 부산 피난민들에게 풍부했던 건 미국의 구호물자 밀. 덕분에 묽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풀빵, 생선살보다 밀가루가 더 많았던 어묵이 인기를 모았다고요.
미국은 1804년 중국에서 들여온 대두(콩)를 재배하기 시작해 1940년엔 세계 최대 생산국으로 등극. 콩기름을 한국에 보내기 시작해 대두 구매를 압박...당시 라면 소비가 늘면서 미국산 대두 수입이 늘었고.. 농산물 무역의 패자는 언제나 우리 농부들. 오늘날 국내에서 재배되는 양배추, 양파, 브로콜리 품종은 대부분 일본산. 파프리카는 네덜란드산으로 외국 종자회사에 씨앗 사용료가 나갑니다. IMF 때 국내 종자회사들이 대거 파산해 다국적 회사에 인수합병 되면서 종자 재산권도 대거 넘어갔군요.. 2005년 183억, 2010년 218억.. 등 농부들은 다국적 종자회사에 씨앗 사용료를 냅니다. 1983년 청양고추를 개발한 중앙종묘도 넘어간 덕분에 현재 청양고추 재산권은 몬산토가 갖고 있다니. 타바스코소스와 스리라차 소스가 주도하는 2018년 기준 세계 핫소스 시장 규모가 2290억 달러(240조원)에 달한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세계화는 매운맛으로 세계인을 길들였군요. 이 시장에서 고추장 존재감은 미미합니다.
랍스터 수입 관세를 낮춘 덕분에 2018년 기준 우리가 미국, 캐나다에 이어 랍스터 수입 3위국이라니.. (으응? 아직 한 번도 밥상에 올려보진 못했는데..)
=== 여기까지 정리하다가.. 방치한채 벌써 몇 주가 후딱. 급마무리합니다. 순전히 정보 메모용 정리입니다. "음식은 문화이고 관습이지만, 본디 정치고 경제였다".. 아무렴요.
식탐(食貪), 식탐(識貪) 많은 저같은 이에게 책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