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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Apr 18. 2021

<뉴스 스토리> 지루하고 재미도 감동도 없는 기사 대신


아무도 읽지 않는 이유, 역피라미드형 기사


"대학생들을 상대로 돈을 번 70대 실향민 할머니가 "죽기 전에 학생들에게 그 돈을 돌려주겠다"며 전 재산인 시가 4억6000만 원짜리 건물을 학교에 기부했다."
독자가 선의를 갖고 기사를 읽어주지 않는 한, 이 기사의 생명은 리드에서 끝난다. 왜 정보 과잉을 참상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미담을 굳이 범죄 기사처럼 육하원칙에 얽매여서 쓸 필요가 있을까? (173~175쪽)

기사 첫 줄에 '야마(핵심주제)'가 드러나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기사를 썼죠. 압축해서 간결하게, '단순면쾌한 요점설명형' 기사였습니다. 그게 몹시 진부하고 지루하다는 건 이제와서 자각합니다. 어떤 뉴스는 제목만 봐도, 무슨 이야기인지 뻔해서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 책은 한국 언론 기사들의 천편일률적 글쓰기 방식을 질타합니다. 게을렀고, 노력 부족이라는 행간의 죽비가 곳곳에서 번쩍합니다. 

첫줄에 많은 정보를 담은 역피라미드형 기사는 이른바 '단순명쾌한 요점설명형'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지적합니다.(33쪽)

단조롭고 지루하여 재미가 없으며 감동을 주지 못한다. 

리드 만으로도 내용을 알 수 있다. 끝까지 읽지 않을 것이다. 

사안을 분석적, 다면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며 내용을 피상적으로 전달한다.

형식이 획일적. 개성적 문체를 살리기 어렵다.


1, 2문단에 인물 사례를 소개하고 3문단에 주제를 제시하는 것(네, 제가소싯적 많이 하던 방식입니다. 그리 배웠는데, 세상에 요즘도 그럴줄일야...) 은 징그러울 정도로 천편일률적인 한국 언론의 기사 전개 방식. 인물 용도는 여기서 끝난다. 일상을 통해 경제적 어려움의 '속살'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기사는 통계나 전문가 코멘트로 주제를 설명할 뿐이다. 최수묵(2011)은 한국 언론이 인물을 철저하게 '투명인간'으로 다룬다고 했다. (53쪽)

그뿐인가요. 기사가 재미없는 이유는 여럿입니다. 주제! 인간은 왜 사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무엇이며 우정은 또 무엇인가.. 인간의 삶과 죽음, 희로애락은 최고의 기사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그것이 역피라미드 구조와 어울리지 않으며 역피라미드 구조로 쓸 재간이 없으므로 주제로 간주하지 않았다. (363쪽)


내러티브 기사는...


역피라미드 기사 목표가 정보 전달이라면, 내러티브 기사의 목적은 감동 유발. 내러티브 글쓰기의 최종 목적지는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다(임정섭). 사람을 기쁘고 슬프고 애달프게 만드는 글이 위대한 글이다. (안수찬). (75쪽)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 Show, don't tell! 
"김태희는 예쁘다". 정보는 전달될지 몰라도 정서는 전달되지 않는다. 그 의미를 보여줘야 한다. 소설가는 일곱 글자의 설명문을 700자나 7000자의 묘사문으로 바꿀 수 있을 것.
 (121쪽) 이게 어떻게 다른지 생생하게 사례 중심으로 정리해주신 덕분에, 정확하지 않은 표현의 나태함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지난 겨울, ㅇ이 말했죠. 제가 "짜증난다"고 했더니, 그렇게 표현하면 안된다고,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지점에서 화가 났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뭉뚱그려 짜증, 이라고 해버리면 그건 감정 배설 밖에 안됩니다. 스스로 제대로 표현 못할만큼, 이해도 못한 그 감정. 
 
135쪽에 나오는 조선일보 최병우 기자의 보도. 1953년 7월27일 유엔군과 북한 사이에 조인된 휴전협정을 보도했는데, 속보 아니라 이틀 뒤인 29일자 1면. "기사의 필수요소인 취재원이 하나도 없다. 코멘트도 없다. 지금 기준으로는 허점투성이. 하지만 기자와 언론학자가 모두 동의하는 한국 최고의 기사. 이벤트를 '행사 기사'로 보도하지 않았다. 육하원칙은 무시하고 행사장 장면과 분위기에 주목했다"고요. 이런 글쓰기는 왜 사라졌을까요. 읽어보면, 아찔한 기분이 듭니다. 어떻게 된건가 싶습니다. 

무책임한 보도 대신...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걸 포장하는 것은 타성적이며 무책임한 보도관행이다. '생활고'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며, 왜 그것을 견디지 못했는지를 심층 취재해야 그들의 고통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근로자는 정치인도 아니고 달변가도 못 된다. 따라서 왜 죽어야 했는지를 십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해서 그들의 죽음을 '이유 없음'으로 지나치는 건 무책임하다. 언론의 역할은, 오히려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고,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데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미디어연구소 2010). 329쪽


박재영 교수님의 의문들도 곱씹어보게 됩니다. (420쪽)


언제까지, 독자가 어떤 뉴스를 원하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채 기사를 만들 것인가?

언제까지, 누구나 다 아는 (출입처 배포) 정보를 기사로 단순 가공하는 일에 몰두할 것인가?

언제까지, 낙종을 신경 쓰며 타 매체의 기사에 연연할 것인가?

언제까지, 단독 보도와 특종에 최고의 가치를 둘 것인가?

언제까지, 사장이나 에디터(부장), 출입처 사람들, 타사 기자들 보라는 식으로 기사를 쓸 것인가?

언제까지, 기사를 천편일률적으로 쓸 것인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묻는 기자들이 없을 리 없습니다. 다만 하루 여러 건의 출입처 자료를 정리하고, 스트레이트 챙기고, 속보도 챙기는데 해석박스도 써야 하는 기자들은 취재할 시간이 부족할게 분명합니다. 독자와 만나는 기사에 공들인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언론사는 이걸 포털 탓 합니다. 포털에 보내는 기사 숫자가 많아야 알고리즘 노출이 잘되고, 트래픽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자신의 가장 고급 상품/서비스가 망가지는데 포털 탓만 하면서 해결할 수 있을까요? 다르게 정리하는 시도들이 없지 않으나 더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가장 확실한 한가지. 한국의 기자와 언론사의 미래를 생각할 때, 가장 확실한 것 한 가지는 기사를 지금처럼 만들면 안된다는 것이다.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이대로 가면 미래는 뻔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419쪽).저널리점의 미래는 낙관적이다. 이렇게 예측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간에 한국 언론이 시도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므로 미래를 낙관해볼 수 있다...  


동료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어떤 이는 흥분했습니다. 길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뉴스를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줘야 할까요. 기사에 울림이 있고, 문장이 고유의 색깔로 빛나는 것은 사실 저널리스트가 가야할 길. 기사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돈을 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뭔가 해보고 싶은 일, 할 여지가 많은 일을 발견하는 것은 함께 하는 모든 이에게 힘이 됩니다. 그런 책이어요.  '기자는 칼럼을 쓰는 사람이 아니며, 써서도 안된다(281쪽)'는 대목 빼고는 박재영 교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미국 사례를 엄청 인용했는데, 미국 스타일 기사가 '하나의 정답'은 아니지만, 다양한 모델 중 하나. 우리는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해나갈 수 있을까요? 최소한 천편일률적이다, 지루하다는 얘기는 듣지 않도록 해야겠죠. 할 일이 많습니다. 기자라면, 기자가 되고 싶다면, 혹은 글쓰기에 관심 많다면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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