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청원 책임자로서 초기 2년여 106개 청원 답변을 챙겼다. 어떤 국민청원이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는 애매하게 답하곤 했지만, 소년법 개정 청원은 잊지 못할 경험이다. 14세 이하 촉법소년 범죄도 강력 처벌해달라는 소년법 청원은 4차례나 답을 내놓아야 했다. (이건 내가 챙긴 것만. 이후 또 이어졌다) 언론은 이렇게 한 가지 주제를 집요하게 추적하지 않지만 국민들은 달랐다. 뉴스는 매번 나오면 식상하지만, 국민들은 매번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2017년 9월 조국 당시 민정수석은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며 보호처분을 보완하는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2018년 8월 김상곤 당시 교육부총리는 교육 차원의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동시에 형사처벌 연령을 14세에서 13세로 낮추는 방안을 밝혔다. 입장이 바뀐 것은 데이터 때문이었다. 14세 미만 강력범죄가 급증하고 있었다. (당시 법무부도 같은 입장이라 법 개정이 추진되는 줄 알았는데.. 그 이후 다른 일들로 바빴던 걸까. 현재 대선 후보들 공약도 촉법소년 연령 낮추는 것. 즉 법 개정 작업은 몹시 더뎠거나 멈춘 상태다) 18년 11월에는 청소년 범죄 숙의형 시민토론 과정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처벌 강화 쪽이었으나 토론 이후 피해자 보호 우선으로 의견이 움직였다. 한 달 뒤 또 소년법 청원이 20만을 넘겼다. 고심 끝에 그간의 경과를 국민들에게 보고한다는 마음으로 준비해 직접 답했다.
이때 청원에 답하기 위해 사건 기록을 다시 찬찬히 보면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매번 다른 청원이지만 사건은 모두 닮았다. 17년 대전 여중생, 김해 여고생, 울산 남학생, 밀양의 집단강간 사건이 첫 소년법 청원의 배경. 두 번째 청원은 여고생이 관악산에서 집단 폭행당한 사건, 11월에는 인천 여중생이 성폭력 이후 협박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건이었다. 다들 언론에 소개된 것보다 잔혹했다. 아이들이 끔찍한 지옥도를 직접 만들었고 피해자의 고통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사건사고 기사는 구경거리 마냥 취급되고, 피해자는 종종 존중받지 못했다. 기록을 읽는 것도 힘든데 대체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 사건들은 익숙하다. 뉴스에도 등장한 실화들. 더구나 청원 답변 준비하면서 많이 배웠다. 빈곤과 폭력이 가정을 해체하고 아이들은 방황한다. 가출 후 패턴은 한결같다. 미성년 성매매 어른들에게 소년들이 협박하며 기생한다. 소녀들은 양쪽으로 착취당한다. 불법 촬영물은 협박용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수요가 문제다. 드라마 대사로도 등장했지만, 어른으로서 미안하다는 말, 도저히 피할 수가 없다. 소통 책에도 소년법 청원 답변 과정을 기록했지만, 이게 오롯이 개인의 책임일까?
김혜수 이성민 이정은 김무열 배우의 연기는 단단하다. 냉정한 캐릭터 옆에 다감한 인물이 합을 더하며 흐름을 살린다. 서로 다른 진실 앞에 우리의 편견을 확인하게 만들고, 인간은 복잡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한다. 사람에게 쉽게 실망하거나 판단하지 않도록 반전이 이어진다. 훌륭한 인간도 나약한 개인으로 흔들릴 수 있다는 장면이 생생하다. 연출 홍종찬 님은 무거운 돌직구로 승부했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며 끝까지 균형을 지키는 극본 김민석 님에게는 그저 감사. 10화 단번에 정주행 하게 만드는 힘이 대단한데, 이게 우리의 현실사회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정말 많은 이들이 애쓴다는 걸 청원하면서 알게 됐다. 하지만 보호관찰관은 턱없이 부족하고 법은 현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나쁜 짓에 무거운 대가가 따른다는 걸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어른들이 더 세심하고 엄정해야 하고, 관련 예산과 지원이 더 필요하다. 미성년 성매매 오픈 채팅은 구매자를 제대로 처벌하자. 함정수사가 필요하면 아이들 보호에 한해서 허용하자. #인간실격 드라마를 비롯해 이 문제를 고발하는 픽션이 줄을 잇는다. 무엇보다 가족에게 맡겨둔 어른의 역할은 구멍 투성이란 걸 인정하자. 아이들을 위해 사회의 돌봄과 교육 안전망이 더 촙촘해야 한다. 또 다양해져야 한다.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면 뭐가 문제인가. 이기적으로 내 새끼만 챙기다가 내 새끼가 살아갈 세상이 망가지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건 아닌가. 어른이라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을 지키지 못하고 미래가 있을까. 매번 청원으로 달려가서 소년법 개정을 외치는 것 외에 우리가 마을의 괜찮은 어른이라면 뭘 해야 할까.
(와중에 진짜 사족. 김혜수 이정은 두 분 동갑이라니…염혜란 배우는 이들보다 어리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