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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Sep 04. 2022

<쇳밥일지>어마어마하게 귀한 이야기인데 심지어 재미있다


교보문고 에세이 신간 가운데 <쇳밥일지>가 놓여있었다. 파스텔 색감 화사한 표지들 사이에서 쇳빛? 색깔도, 폰트도 어울리지 않았다. 아, 맞다. 에세이였지. 정치사회 분야 책이 아니라 한 청년의 내밀한 기록이지.


"너무 빨리, 너무 잘못 철이 들어서, 가난과 상처의 껍질 속에 불안과 소심을 감춘" 청년이 "놀라우리만치 찌질"했던 시절을 고백하는데, 직업이 특이하다. 마산의 용접공? 평범하지 않은 이대남. 근데 이게 고정관념이란 걸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사실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이야말로 이 사회에서 평범한거 아닌가? 언론의 뉴스에서도,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다루지 않는 '투명인간'이라 보이지 않는 탓에 낯설고 특별하다니.


"중소기업에서 무계획 소품종 다량 생산을 시도하면 햄릿과 리어왕, 오셀로와 멕베스가 사이좋게 저승에서 탄식할 비극이 벌어진다" 사실을 현장에서 배웠다며, 찰진 비유를 구사하는 능력자지만, "여덟  이후  한번도 가난에서 벗어난  없던 . 줄곧 공장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몸에 새긴 주제 파악. 혼자 건사하기도 벅차서 평범함조차 사치라며 어내버린 , 평생 바닥에서 벗어날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체념한" 인간으로서 생애  심쿵 '피고백'조차 거절했던  청년.. 진짜 이야기꾼이다. 사실 작년에 페이스북에서 그를 발견한  "심봤다" 주목했다.

2020 11 미디어 스타트업 'alookso' 창업한 나는 현장이든 지식이든 자기 분야의 중요한 이야기를 쉽고 생생하게 구현하는 이야기꾼들을 찾고 있었다. 기존 미디어에서 쉽게 인용하는 전문가 대신 '다른 관점' 갖고 목소리를 내는 이가 필요했다. 2021 가을, 베타서비스를 시작하며 외부 필진을 구할  천현우님을 섭외한건 당연한 수순이다. 10여명의 초기 외부 필진 가운데 개인적으로 팬심을 불태운 이들  하나다. 그를 채용할 계획도 세웠지만 어찌저찌 내가 alookso 떠난 이후에야 그의 합류 소식을 들었다. 기쁘고 아쉬웠다. 함께 일했어도 좋았겠지만  몫은 거기까지. 그가 '다른 ' 가진 alookso 에디터 '세린'으로 변신한데 판을  것만으로도 뿌듯한 일이다. 사실 만난  없는 처지에 책을 보내줘서 놀랐다. 마음 써주는 다정한 청년일세.


나의 옛 최종보쓰의 추천을 비롯해 책에 대한 상찬이 쏟아져서 더 보탤 말이 없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쉬는 시간엔 게임만 했다는 이가 뭔 글을 이렇게 맛깔나게 쓰는지. 사투리도 생생하지만 온갖 비유가 만담 개그마냥 웃겨서 지옥 같은 현장 이야기란 걸 잠시 놓친다. 절망을 버텨내는 뚝심에 감탄하면서도 그동안 놓쳤던 우리 시대의 현실에 아득하다. 비정한 사회에서 약자의 이야기를 전해야 할 미디어가 뭘 않고 있는지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귀한 이야기다. 언론은 서울대 학생들의 게시판을 주요 취재원으로 삼지만,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청년은 어쩌다 한 줄 코멘트 외엔 인용하지 않는다. 교육문제든 노동문제든 '투명인간'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고 믿는 이로서 그는 독보적 이야기꾼이다. '청년공, 펜을 들다'는 부제 자체가 사건이다. 근데 무지 재미있기까지 하니 이거야 원.


'90년대생'에 대한 관심과 '이대남'에 대한 분석이 쏟아지지만, 그들이 어떻다고 뭉뚱그려 바라보는 것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일이다. 갈라치기 선동하는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기 싫다. alookso가 '공부방 계급론'으로 세밀하게 뜯어봤듯 세대나 성별 갈등에 가려진 계층 문제가 핵심 과제다.


대다수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지 않는 사회, 사람 차별하고 존중않아도 괜찮은 경제 구조가 지속가능한걸까? 정답이 없는 문제라고 해서 해법까지 없어도 되는건 아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있고, 개인이 가져야할 문제의식이 있다.
 

학벌 콤플렉스에 대해 횡설수설 떠드는 그에게 '포터 아저씨'가 해준 말이 있다.


"야. 현우야. 우리 없으면 누가 다리 만들어주냐? 우리 뿐만 아냐. 청소부, 간호사, 택배, 배달, 노가다. 이런 사람들 하루라도 일 안하면 난리 나. 저기 서울대 나온 새끼들이 뭐하는 줄 알어? 서류 존나 어렵게 꼬아놓고, 돈으로 돈 따먹기만 하고, 땅덩어리로 장난질이나 치지. 그런 새끼들보다 우리가 훨씬 대단한 거야. 기죽지 마" (116쪽)


이른바 코로나 거치면서 알게  '필수인력'이다. 절대 기죽지 말아야  이들이다. 알량한 시험성적으로 줄세우는게 공정하다며 시민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리면 포터 아저씨에게 부끄럽다. 몸으로 삶을 배워온 천현우님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현장을 떠났지만 책상 앞에 앉아서 끼적일 성미는 아닌 듯하여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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