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상대가 후줄근하게 나오면 내가 무시당한 느낌이듯, 아바타를 꾸미는 것도 일종의 예의라고. 그게 아이들이 즐기는 게임 로블록스의 세계라고 했다. 가상세계의 내 프로필은 내가 연출하는 시대. 과거에도 자기소개서에 나를 포장했겠지만, '좋아요'로 평가받고 가치 매겨지는 프로필의 시대는 또 다르다.
프로필 사회, 제목이 다 한 책이다. 원제는 You and Your Profile: Identity After Authenticity. 마이클 샌델의 추천사를 빌리면 "진정성(자신에게 진실한)이나 성실성(자신의 역할에 충실한)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프로필 큐레이팅으로 오늘날 현대인들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조회수, 좋아요, 평점, 팔로워를 늘리는 등의 프로필성이 진정성을 대체했다"는 시대의 이야기다.
조금 들춰봤을 때 흥미로워서 고른 #트레바리 #디지털탐구생활 9월 책. 밝혀두지만, 멤버들에게 무척 미안했다. 클럽장 주제에 내게는 몹시 어려웠다. 독일인 저자 한스 게오르크 뮐러는 장자를 연구한 마카오대 철학 교수. 샌델과 공저를 낸 바 있는 폴 J. 담브로시오는 중국 상하이 화둥사범대에서 중국철학을 가르친다. 철학자들이 '진정성', '성실성', '프로필성'을 정의하면서 니체와 장자를 인용하는게 내겐 버겁다. (쉽게 쓰는 미국인들과 다른걸까. 같은 이유로 한병철님 책도 내겐 힘들다..) 번역도 나빴다. 직접적 평가 외에 '좋아요' 등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메타 평가 같은 개념, second order observation을 2차 질서 관찰이라 부르다니. 이건 개념을 먼저 연구한 니클라스 루만의 표현을 그리 번역한 전례가 있다해도, 도무지 이해못할 번역이다. 뭔 질서야..
당분간 독일 학자, 특히 철학자 책은 고르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나갔는데.. 의외로! 다들 책이 좋았다고 했다. 미국 책처럼 가볍지 않아서, 시의적절한 개념 정리라, 생각해볼 여지를 많이 줘서, 프로필 꾸미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게 아니란 깨달음을 줘서, 진정성이란 거짓말을 다시 보게 해줘서.. 좋다고. 보이는 나와 실제 나의 차이를 인식하며 스스로 깜냥이 되나 자문해오던 와중에 위로가 됐다는 고백도 나왔다. 다행이다... 내 수준이 가장 떨어지는 걸까. 음..
저자는 중국 사람들이 셀피에 집착하고, 이미지 보정앱이 매달 수십억 장의 사진을 처리하고, 보통 40분에서 1시간씩 보정하는 걸 비판한 잡지 뉴요커의 기사를 비판하면서 시작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에 과도하게 몰입하고, 진정성이 결여됐다는 식의 접근이지만, 그게 어디 중국인들만의 일이냐, 한국 일본 아시아 다 비슷하고.. 사실 치아미백 주름제거 등 성형수술 등은 북미가 원조 아니더냐는 얘기다. 무엇보다 뉴요커 작가, 필자 사진들도 기사 표현대로 ‘천편일률적이고 소름 돋도록 비슷’하게 창의적이고 독창적이고 젊고 지적인 정형화된 캐릭터라고. 프로필을 비판한 이들조차 마음에 드는 사진으로 소셜미디어 프로필을 꾸미지 않냐고. 진정성이 대체 뭔데. 오늘날 여행이 프로필을 구축하는 활동이고, 사진찍어 올리는데 더 열을 올린다 한들.. 정체성이라는 잉여가치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다만, 평가와 프로필에 집착하며 대중적 페르소나를 가꾸는 이들과 사회적 평가 메커니즘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실’하고 ‘자유롭게’ 서로 소통하는 이들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는 블랙미러 ‘추락’ 에피소드가 언급되는데.. 정말 끔찍한 디스토피아 얘기.. 좋아요에 집착하며 프로필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일은 이미 현실에 등장한다.
역할이 요구하는 '성실성', 겉모습이 진짜이고 내면은 그것을 뒷받침해야 한다든가, 독창성이 필요한 '진정성'은 내면이 진짜이고, 겉모습이 그걸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하면 가식과 위선이 된다는 지적. 모두가 진짜인 척 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인 척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 비판적으로 인식하는게 관건이란 얘기를 놓고 벌어진 토론이 책보다 재미있었네. 인정욕구야 프로필을 큐레이션하는 단계가 아니라도 인간 본성 아니던가.
알고리즘이 개인의 진정성에 관심 없고, 패턴과 선호도, 성과에만 관심갖는 것과 관련, "어떤 영상이 여러분의 영혼에 가장 깊은 감동을 남길지 알고 싶은게 아니라 여러분이 다음에 클릭할 가능성이 가장 큰 영상을 알고 싶어할 뿐"이란 얘기도 적어둔다. AI와 인간의 차이, 인간의 경쟁력이 저기 있지 싶다.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멤버 덕분에, 디지털 네이티브인 요즘 아이들은 온라인 관계에 신뢰가 없고, 온라인 사람을 굳이 오프라인에서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고. 거의 모든게 감시같은 투명사회에서 프로필을 남기지 않으려는 이가 오히려 프로필 관리에 공들이는 편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프로필 사회> 내 발제다.
1. 프로필이 뭐길래
- 자기 표현을 위해, 프로필을 연출한 경험 혹은 그걸 의식한 적 있나요? 페르소나를 큐레이팅했던 것 같아요?
- 타인의 프로필에 호감, 비호감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요? 그 기준에 진정성이 있던가요?
- 평가와 프로필에 집착해 대중적 페르소나를 가꾸는 이, 혹시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 착한척 쿨한척 하는 태도가 결국 내면도 바꾸게 될까요? 혹은 그저 가식과 위선일까요? 구별은 되요?
2. 메타버스 시대의 프로필
- 가상세계의 나와 현실세계의 내가 다른 가면을 갖고 있는 것에 불편한 적 있나요?
- 개인의 미덕은 순위, 리뷰, 댓글에 드러나야 가치가 있다는 주장 관련, 온라인에서 프로필은 타인의 평가와 반응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까요?
- 정체성 정치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치적 성실성, 현실적 해법을 생각해볼까요?
- 프로필 노이로제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 성실성과 진정성을 이상화하지 말고, 모든 정체성에 의문을 갖는 비판적 인식이 답이 될까요? 혼돈을 피하는 균형점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