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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Sep 20. 2022

<아직도 가야할 길>1978년 훈육,사랑 얘기 힘든이유

엄마가 되고 난 뒤 나는 여러 번 당황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이 어려운 상황이 여럿이었다. ‘엄마 학교’를 다니지 않고, 배운 것도 없이 제대로 엄마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왜 가르쳐주지 않은채 모성본능 마냥 저절로 엄마가 된다고 하는 거지? 배움 혹은 노력 없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마음과 달리 아이에게 화를 낸 적도 수없이 많다. 조건부 사랑 마냥 이러저러한 미션을 수행하면 상을 준다는 식으로 엄마의 사랑을 왜곡한 적도 적지 않다. 말 안듣는 꼬마에게 체벌 대신 할 수 있는게 그런 거였다고 우겨보고 싶지만 교과서처럼 훌륭한 엄마가 될 수는 없었다. 아이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을 담고 살아도 내 입에서 나간 싸늘한 말이 매보다 아팠을 상황도 여럿이다. 일하는 엄마로서 파트타임 엄마하는게 훨씬 쉬웠다. 내가 온전히 육아를 맡았던 미국 연수 시절, 실컷 사랑하는 시간만큼 싸우는 시간도 늘었다. 그러다가 동네 선배가 어느날 말했다. 야, 수습 깨듯이 애들 혼내지마. 내가 기자 후배들 질타하듯 아이들을 대했다고? 충격과 공포였다. 그 이후, 확실히 조심했다. 옛날 얘기다.


책에 나온 훈육 얘기는 하나도 새롭지 않다. 정혜신님의 ‘당신이 옳다’를 옳다고 믿는 당옳 교인으로서 나름 애쓴 세월도 몇 년이다. 머리로는 아는 얘기를 실행하는 건 다르다는게 문제인데, 세상만사 뭔들.

삶은 고해. 고통을 겪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으며, 문제에 직면하고 그에 따르는 고통을 겪을 필요가 있다는 걸 알게 하자고?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 인간이라 자부하고, 성찰형 인간이라 내심 뻐기지만 나이가 들어도 고통의 아픔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지난 겨울 몹시 힘들었던 나는 바닥에 가라앉았다. 미국에 있던 정신과 의사 친구가 “언니, 분명 지나고나면 값진 경험일 것”이라고 위로했지만 겪지 않는 편이 좋았다고 항변했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성장을 더 하겠다고 난리냐고 했지만, 그래도 그는 겪는 편이 좋다고 했다. 계절이 바뀌면서 나는 조금 더 성장하고 단단해졌다. 다 아는 얘기 같은 책에 온정적이라면 그런 시간을 지낸 덕분일 수도 있다.

사랑을 또 책으로 공부할 일인가, 국경 모임에서만 몇 번째인가 싶은데.. 솔직히 아직 읽는 중이라 판단을 미루겠다. “갓난아기나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것이나 의존적이고 복종적 배우자를 사랑하는게 본능”이라는 대목에서 약간 빡쳤다. 끝까지 읽어야 할까?
 
 ===== 라고 독후감을 썼다. 사설이 긴 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증거다. “수천만 세계인이 성경과 나란히 하는 책”이라는 카피에도 불구, 1978년 훈육, 사랑, 성장, 은총 정리는 2022년 낡은 느낌이다. 훈육과 사랑만 간신히 대충 읽었다. 국경 모임 9월 책으로 굳이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 토론이 재미있어 남긴다.
 
‘훈육(discipline)’보다는 ‘공감’으로 육아 트렌드가 바뀌지 않았나 싶은데, 난 후자 쪽을 지지하는데, ㅅㄱ님은 이 둘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양육법이란게 사실 정답이 있을리 없고, 다 안다고 해도 뜻대로 되는건 아니라는 것에는 모두 동의했다. 가부장 시대의 사랑관은 꽤 당혹스럽고, 책을 덮는 계기가 됐는데 1956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도 그렇다는 ㄱㅇ님 말씀 들어보니 어쩔 수 없겠다...

고작 몇 십년 만에 낡아버린 책과 고전은 어떤 차이일까 생각하게 되지만 개별 문장은 꽂히는게 있다는 ㅈㅊ님 말씀에 공감한다. 삶은 고해다.. 첫 문장에 괜히 심쿵했고, 삶은 문제의 연속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운 거란 아련해졌다. 누군가에겐 도움될 수도 있겠다.
 
‘훈육’ 대상이 꼭 아이겠느냐, 우리도 평생 훈육이 필요한게 아니냐는 ㅌㅎ님. 그런 훈육의 목적이 훨씬 더 어려운 질문인데, ㅎㄱ님은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이라 했고, ㅅㄱ님은 “독립적이고 완결된 인격체”라고 했다. 난 아직도 그런 인격체가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잘 양육된 아이는 회복탄력성이 좋고, 호기심과 욕심이 평균보다 많다. 세상을 좀 더 관심있게 바라보고, 하고 싶은걸 능동적으로 찾는다”는 교사 ㄱㅇ님 설명이 어른인 내게도 도움된다
 
정신과 의사로서 영적 성장을 다룬 이 책의 후반부는 읽지 않았다.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 우리 중 유일하게 완독한  ㅈㅎ님은 “훈육, 사랑, 성장 등 앞의 빌드업은 은총까지 가기 위한 것”이라고 책을 한 줄로 정리해줬다. 삶은 고해이고, 영적 성장을 통해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것이 은총인데, 그건 고독한 길이라고. 설명듣던 ㅌㅎ님이 말했다.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적 실존주의네.” 그렇단다. ㅈㅎ님 덕분에 안 읽고도 느낌 알 것 같다니 몹시 고맙다. 비록 ㅈㅎ님은 괴로워했지만^^;;
즐거움을 나중으로 미루는 인내를 가르치는 건 청교도적인데? 싶었더니 역시나 뒤에 가면 저자가 '신청교도'라고 스스로 정의한다는 ㅈㅎ님 설명까지 감사.
 

ㅅㄱ님은 68세대의 저항정신에 대한 반격으로 보수적 기독교가 다시 떠오르는 과정에서 1978년 이 책의 반향이 컸던게 아니냐고 했다. 사실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68년 이후 미국은 진보 대신 보수, 복음주의 기독교 움직임이 거셌고, 1980년 레이건 대통령 당선으로 리버럴한 저항 시대는 끝났지. 책은 그 시절의 성경이었을까? 옳은 걸 따지는 ‘도덕지향자’들을 위한 가이드였을까. 아마존엔 독자리뷰가 5900개나 달려있다.
 
책을 읽는 동안엔 이걸 왜 읽어야 하나 싶었는데, 세상을 읽는 재미는 역시 토론이로구나. 토론하다보니 또 …삶은 계속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걸 깨닫는 여정이다. 삶은 고해라니까.

근데 이 책 보자고 투표한 10명 중 8명이 독후감 안쓰고 불참한건 뭐냐. 이 책 투표 않은 이들끼리 모여서 토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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