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을 공부한 웹툰 작가가 심리학을 소재로 한 웹툰 으로 성공했으니 이종범님은 성덕? 부러운 분이다. 그 웹툰을 무려 10년이나 연재했으니 그는 성실한 창작자이고, 이쯤되면 자기개발 구루로 나선들 박수칠 수 밖에 없다.
'웹툰을 그리면서 배운 101가지'라고 했는데, 웹툰 작가 지망생이 아닌 나같은 독자에게도 와닿는 건 그런 이유다. 곱씹어 보게 되는 말들이 꽤 있다. 첫번째 문장부터 내겐 가볍지 않았다.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재미없는 만화를 그려보는 것이다 (1)
슬프게도 이 단계를 건너뛰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최대한 빨리 맘에 안 드는 원고를 해보고 슬퍼하자.
작가로 나서기 이전에도, 글쓰기에 관심있는 인간으로서, 글은 계속 쓰는 수 밖에 없더라. 십수년 기자로 살았는데 딱 그만두고 나니까 글쓰는 법을 잊더라.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초대하는 것이 연출의 시작이다 (6)
그래서 많은 콘티들의 첫 컷이 배경으로 시작된다. 응용하면, 인물 컷으로 초대하거나 특정한 사물 컷으로 초대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중요한 점은 독자가 이야기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걸 잊지 않는 것이다.
글 컴플렉스 인간으로서, 컨텐츠로 비즈니스까지 모색했던 이로서, 이야기가 전부다. 거기로 어떻게 끌어들일지 고심한다. 내가 썩 재능없는 부분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생각은 이어간다. 특히 첫 줄에서 낚는 건 너무 어렵다.
엔딩에 들어갈 강력한 대사를 먼저 만들어두자 (7)는 얘기도 같은 맥락에서 엄청 중요. 엄청 어렵다.
결핍이 있어야 좋은 캐릭터다. (17)
인간은 누구나 결핍을 안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구멍을 메우기 위해 일생이라는 여정을 떠나는 것이 삶이다. 따라서 좋은 캐릭터는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그림자, 결핍, 구멍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를 키우면서 결핍을 생각했다. 갖고 싶은 거 다 갖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될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잘 자라도 우리는 다양한 결핍에 시달린다. 사람 많은 내가 사람 결핍에 시달릴 때도 있더라. 그게 나쁘거나 실패한게 아니란걸 이제는 안다.
원래 이야기는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우러나는 것이다. (24)
그럼에도 때때로 쥐어짜야만 하는 순간이 오는 게 직업적 창작의 슬픈 부분이다.
아.. 일로 하면 다 그렇구나. 이야기가 우러나와서 이야기꾼이 되거늘. 무튼 내 안에서 무르익고 나올 때까지 나를 채우는 수 밖에.
주인공은 욕망이 있어야 한다. (31)
욕망이 없는 주인공은 시동이 걸리지 않는 자동차와 같다. 처음엔 뒤에서 밀어줄 수 있지만, 결국은 욕망을 가져야 여정을 떠날 수 있다.
인간은 욕망으로 움직인다. 욕망을 버리라고, 계몽하는 것, 욕망 없이 착하게 살라고 하는 건 좋은 전략이 아니다. 부동산 정책이 그렇게 된건지 봐야한다.
인간을 관찰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한 표현이다. (34)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관찰한다고 표현하는 쪽이 훨씬 도움이 된다.
결국 욕망. 그리고, 두려움. 차별과 혐오의 재료도 사실 알고보면 불안과 두려움이지.
작가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자신의 손끝에서 나온 엉망의 재미없는 결과물을 볼 용기다. (40)
실패한다는 것, 내가 만든게 별볼 일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건 진정 용기다. 삶이란 이걸 얻는 과정 같다.
좋은 만화를 그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좋은 만화를 많이 보는 것이다. (43)
이건.. 쫌.. 내가 읽고 본 컨텐츠로 따지면 나는 이미 위대한 작가가 됐어야.. 안됐다면 게을렀다는 건데.
모두에게 사랑받는 작품은 없다. (61)
오직 사랑받기 위한 목적만으로 웹툰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 결국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된다. 웹툰과 웹소설은 소비자의 반응이 제일 직접적으로 창작자에게 닿는 분야이다. 이곳에서는 세게 최고의 거장도 악플을 겪을 수 있다.
조금 출세한 뒤, 악플을 경험했다. 착하게 (혹은 착한척) 살아온 내게 왜 이런 일이. 그냥 그게 약간 잘나가게 된 것의 댓가이고 비용이란 조언이 유용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건 헛된 욕망이다. 이제 그 정도는 안다. 우리 서로 좋아하는 이들끼리 좋아하면 된다니까.
근육은 마감에 도움이 된다. (80)
웹툰 작가는 머리와 함께 몸을 쓰는 직업이다. 운동선수가 비시즌에 탄탄한 몸 상태를 만드는 것처럼 웹툰 작가에게 운동은 직업적인 기초 관리다. 마감에 도움이 되는 근육은 등과 하체다. 연재 도중 응급차 천장을 바라보는 경험은 한번으로 끝내는 게 좋다. 나는 두 번 했다.
아.. 두 번 하셨단다. 진짜 뼈를 깍고 몸과 맘을 갈아넣는 게 창작이지. 아니 일이란게 원래 그렇다. 내 이름 걸고 책임지는 일이란 다 그렇다. 늘 막 굴린 내 몸에 미안한 즈음이다. 이 정도 견뎌줘서 고맙고. 앞으로 잘할게..
더 잘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안심하라(86)
요건 부연설명 나만 보련다. 너무 와닿는다. (책을 보시라)
만화의 세계는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는 게임이 아니라,
당신의 자리를 찾는 게임이다. (91)
부디, 모쪼록, 당신들의 능력과 경험을 남들 밀쳐내는데 쓰지 말아라. 쪼잔한 밥그릇 차지하겠다고 엥엥대는 건 정말 부끄럽다. 이 문제에 있어서 겸손할 여지는 적다. 난 남의 자리 관심두지 않았다. 내 정신건강에 해로워서.
좋은 피드백은 좋은 질문에서 나온다. (95)
늘 말하지만, 질문이 중요하다니까. 답보다 훨씬.
색감이 없다고 느껴질 때의 조언과 색감에 통일성이 없다고 느껴질 때의 조언 등 만화를 그리는 분들에게 아주 구체적이고 도움되는 팁도 많지만..내게도 좋았던 책. 저자 사인본 자랑 삼아 기록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