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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Feb 16. 2023

이중섭, 사랑꾼 화가의 사무친 그리움은 전쟁으로..

이rjs 퍼온 사진. 이중섭 화가가 담뱃갑 알루미늄 속지에 그린 은지화, 확대해서 미디어아트로 보면 또 다르다.

이중섭 그림을 보고 왔다. 하늘의 별을 따듯, 그 어려운 예약에 성공한 L온니가 티켓을 양보했다. 대신 누렸으니 온니를 위해 짤막 후기. 그림보다 사람이 먼저더라. 그의 삶이 작품보다 더 뜨겁게 불타고 외롭게 사그라졌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은 이건희 회장의 유족이 기증한 1488점 중 이중섭 작품 90여점과 기존 소장품 10점을 엮었다. 입구 복도부터 그의 편지글과 ㅈㅜㅇㅅㅓㅂ 의 선들이 인상적이다.


사랑밖에 난 몰라
 
“예쁘고 진실되며 나의 진정한 주인인 남덕 씨” (1953.3)
 
“사랑스러운 당신과 아이들이 곁에 있는데

왜 화공 대향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지 못하고
새로운 표현을 찾지 못하겠소” (1953.6)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굴하지 않고

소처럼 듬직한 발걸음으로…..힘을 내 그림을 그린다오.
그대의 상냥한 편지만이 내가 매일 기다리는
나의 유일한 기쁨이라오. (1954.11)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무살에 일본유학을 떠난 그는 1년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연인이 됐다. 남쪽의 덕있는 여인이라고 '남덕'이란 이름으로 진정한 주인이라 부르고, 본인의 호를 써서 '화공 대향'이란 주어도 쓰고.. 오글오글하다고 할 연애편지가 뜨겁고 절절하다. 부인에게 저런 편지를 계속 쓰는 남자가 아직 있을까? 나만 모르는 걸까?

편지도 예술이다. 부인과 두 아들을 그리는 자신일까? 무튼 글씨 바닥에 채색한 마음, 하늘의 태양과 별과 달을 그려넣은 그 마음을 헤아리려니..


연인시절 그는 그녀에게 엽서를 보냈다. 88장이 남았는데 1941년에만 75장이다. 일주일에 두장도 보낸걸까. 맘에 안들면 여러번 다시 그렸다니까, 깨어있는 매 순간, 오매불망 그녀 생각만 했던 사랑꾼. 9X14cm 작은 종이 한면엔 그림을 그리고, 뒷면엔 속삭였겠지. 주로 초록과 빨강. 색감도 좋고 선은 자유롭다. 아무리봐도 남태평양 어드메에 어울릴 거침없는 표현. 저 몸들이 어디 동양의 것이냐고..

나뭇잎을 따는 여인. 오른쪽은 '걷는 사람'
동행한 K선배 말마따나 저 색감 뭐냐고. 왼쪽은 '원과 삼각형', 오른쪽은 '줄 타는 사람들' 둘 다 1941년 작.


초기 엽서들. 소의 머리에 물고기 꼬리 생물과 오리. 거기 편안히 누운 사람.


천재도 연습연습연습


습작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는 계속 그렸다.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는 5점이 그려졌는데, 그 중 2점이다. 같은 구도, 다른 기법.


역시 다른 색으로 확 달라진 작품 '사슴과 두 어린이'.



다방에서, 길바닥 쓰레기더미에서도 담배갑을 주워 알루미늄 속지에 그림을 그렸던 시절이다. 수십 점의 은지화는 나중에 제대로 된 작품으로 그리겠노라 편지했다지만 그에게 그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철필이나 못으로 그은뒤 검은 물감을 붓고 슥슥 문지르면 선만 또렷하게 남았다고.. 그의 그림은 온통 몸이다. 부둥켜 안고 붙잡고 연결된, 외로운가.

왼쪽은 내 직찍. 오른쪽은 펌.. 은지화 폰으로 찍는건 무리. 그 느낌 안나..


한국전쟁 시기 군대 그림도 그렸는데.. 왼쪽 새 그림은 퇴짜 맞았다고. 너무 호전성이 약했다나. 오른쪽은 켄타루오스 같은 피투성이 반인반마가 칼을 높이 휘두르고 있다. 이건 합격? 새 그림은 나중에 '자유문학' 표지가 됐다. 그는 문예지 표지도 꽤 그렸다. 생계형이다.

오래전 들렸던 제주도 이중섭 기념관은 그가 지낸 누추하고 비좁은 방의 기억만 남아있다. 사진을 보면 한시절 댄디보이, 1930년대에 예일대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임용련 선생님에게 드로잉을 배웠고, 결국 일본 유학까지 갔던 엘리트. 그는 해방 직전 결혼해 고향 원산에 자리잡았다. 학교, 고아원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아이들 그림을 많이 그렸단다.

다섯 명의 아이들. 비슷한 제목의 아이들이 많더라.

그의 인생에 결정타는 전쟁이다. 아무리 뛰어난 이들이든, 보통 사람이든 평등하게 고통으로 몰아넣는 전쟁의 후폭풍.
그는 한국전쟁 발발 후 피난오면서 그때까지 작업한 그림을 고향에 두고 왔다. 어머니에게 자기 대신 보라고 남겼단다. 결국 생이별이다. 우리는 당시 작품들의 행방을 모른다. 피난민으로서 부산에서 제주로 건너가 가족들과 1년여 보낸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까? 해초를 뜯고 게를 잡아 굶주림을 면했던 그 시절이 그래도 가장 따뜻한 시절이었을까?  1952년 가족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1953년 잠시 재상봉 이후 그는 계속 가족을 그리워했다.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보내고, 그림으로 가족들을 담았으니, 그의 예술혼은 내내 사무치고 애절하다.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기운을 내고, 소처럼 버티며 씩씩한 사연을 보냈지만, 말년의 그는 영양실조와 거식증에 시달렸다. 당시 미도파백화점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열고, (당시 사진이 남은 그의 사촌형 가족을 보면 부티난다만) 부산과 통영 일대에서 이쾌대, 전혁림 등과 교류하며 그림을 계속 그렸지만, 1956년 그는 '무연고자'로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외롭게 이승을 떠났다. 향년 40세. 너무 젊었다.

<춤추는 가족>, 제목부터 그림부터, 그의 그리움이 절절해 슬프다.

그의 말기 작품 '정릉 풍경'. 어쩐지 다른 작품에 비해 색감이 쓸쓸하다.


번외편> 임용련 선생님. 대체 그 시절에 예일대 졸업한 미술교사라니? 찾아봤더니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당대의 해방여성이었고, 글로벌 인재였고, 한국전쟁 와중에 북에서 처형됐다... K선배 말마따나 “인생 자체가 대하드라마”.

http://www.coreens.com/part1/946


국립현대미술관의 똑똑한 로봇 가이드. 제주의 배우 고두심쌤의 가이드로 그림 설명 재미있었다.  


L온니 양보로 얻은 귀한 관람 기회. 급히 동반을 구했다. K선배 놀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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