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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Mar 15. 2023

호사로운 합스부르크 예술, 고아한 조선왕조 의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박물관을 좋아한다. 줄이 길었다. 평일 오전이긴 한데,  #합스부르크_600년_매혹의_걸작들 전시 마지막 날이다. 사람들 많이 찾는다고 뉴스에도 나온 그 전시다. 이집트 여행을 함께 했던 L님 덕분에 귀한 초대장을 얻었다. 줄을 보니 얼마나 귀한 선물이었는지 실감났다. 옆지기와 평일 박물관 데이트 티켓이다.

합스부르크, 1273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루돌프 1세를 시작으로 세계 1차대전 직후까지 유럽을 지배한 왕가다. 교황이 힘없는 황제를 갈아치우던 시절, 스위스 시골 귀족으로서 바지사장 마냥 어부지리로 추대된 황제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시조가 될거라 누가 예상했을까. 세상은 요지경이라니까. 유럽 왕실이 온통 자기들끼리 혼맥으로 얽힌 시절이었다. 황제의 이름은 흔한 느낌이지만 낯설다. 합스부르크의 위세와 영광은 황제들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이 후원한 예술과 건축으로 남았다. 권력은 언제나 그랬다.


왕의 딸과 결혼하려다 헤라클레스에게 죽는 켄타루오스 에우리티온. 1600년대 청동 조각은 아름답다. 16세기 후반 헤라클레스 대리석상은 카를5세를 닮았다고. 이집트 파라오들이 신과 동급으로 벽화를 남겼듯, 왕들은 영웅으로 남겨봤다. 그래봐야, 우리는 헤라클레스만 기억하지, 카를5세를 모른다. 서사가 없는 권력은 허망하다.


첫번째는 막시밀리안 1세의 갑옷이라는데, 기록으로 전하는 갑옷 중에 가장 오래됐다. 정교하고 아름답다고 감탄하는데 그 옆의 루돌프2세의 리본 장식 갑옷, 페르디난트2세 대공의 독수리 장식 갑옷을 보니 어이가 없다. 장인이 한땀한땀 장식한 갑옷이다. 갑옷이 불편하지 않다며, 갑옷 입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영상은 빵 터진다.


16세기 '누금 장식 바구니'는 아기 주먹 크기에 가는 금줄과 알갱이로 섬세한 세공이 놀랍다. 황제의 소장품 정도 되려면 저 정도. 황제의 술잔, 샤베트 그릇도 저 정도는 되어줘야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스페인 왕 펠리페4세 딸이다. 1651~1673. 공주라도 22년 밖에 못 살았다. 게다가 외삼촌인 레오폴드1세와 결혼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저 귀여운 꼬마는 무려 공주님인데, 인생 참..


루벤스의 '은둔자와 잠자는 안젤리카'. 공주가 은둔자의 구애를 거절하자 은둔자가 약을 먹여 접근한 얘기라나. 1625~28년 작품으로 이탈리아 시인의 16세기 작품에 영감을 얻었다는데 그 시절 공주도 늙고 못생긴 스토커의 희생양이 되는건가? 미친. 공주만 아름답게 벗겨놓아서 더 화난다.


1907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제복이다. 금색 자수에 빨간 소매깃 장식에 화려하다만. 뭐랄까, 황제도 입고 다닌게 별거 없었다는 느낌.


진짜 충격을 받은건 19세기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사랑했던 엘리자베트, 시시 황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한눈에 반했다는데 자유로운 영혼이라 엄격한 황실에서 힘들었고, 1898년 제네바 여행 도중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가는 송곳으로 가슴을 찔렀는데 코르넷을 너무 조여놓아 몰랐단다. 스위스를 떠나는 배에 타고 코르셋을 풀자마자 피가 솟구쳤고, 황후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한 마디만 남기고 숨을 거뒀다. 치명상을 입어도 그런줄도 모를 만큼 허리를 조이고 살았던 그녀. 그림의 가는 허리가 슬프다.


그 시절 오스트리아와 수교한 기념으로 고종이 보낸 조선의 투구. 아름답다.


모처럼 박물관 데이트인데, L님이 외규장각 의궤까지 보면 좋을거라 했다.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구경. 그리고 한 사람의 의지가 바꾸는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의궤는 '의식의 궤범軌範', 조선시대 중요한 국가 행사의 전체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당시 외척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했던 강화도의 외교장각에 보관하고 있다가 병인양요(1866)로 프랑스 군인에게 약탈당한 보물이다. 145년이 흘러 2011년 돌려받았는데, 여기 박병선 선생님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박병선 박사는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 시절 이런 여성이?? 여기에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조작 사건 이후 프랑스로 귀화한 사연도 궁금하지만, 넘어가자. 그는 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던 중에 직지심체요절을 발견, 고증을 거쳐 구텐베르크 보다 78년 빠른 금속활자 인쇄본을 밝혀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홀로 작업을 이어갔고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별관 창고에서 먼지 쌓인채 방치된 외규장각 의궤 297권을 발견했다. 의궤 반환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해고당했지만 개인 자격으로 도서관을 찾아 의궤 내용을 정리했다. 평생을 의궤 반환을 위해 헌신하고 떠나신 분이 있었다. 의궤가 대체 뭔지, 어떤 의미인지, 아무도 모를 것을 찾아내고 해석하고 우리에게 남겨주셨다. 한 사람의 의지란.


그 책들이 아름답게 보관되어 있다. 이집트 카이로박물관을 다녀와서 그런지,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 기술과 역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의궤는 왕이 보는 '어람용'과 관련 업무 담당자들이 보는 '분상용', 두 가지 종류로 남겼는데 어람용 의궤는 왕실의 품격이 느껴진다. 붉은 삼베를 쓴 분상용과 달리 초록색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었고, 놋쇠 판에 국화꽃 모양 못을 박고 고리를 달았다. 글씨조차 더 잘쓴 이들만 골라서 배치했다. 다르다.

의궤는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업무 매뉴얼 같다. 모든 행사의 진행 과정과 필요한 무대, 설비를 일일이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꼼꼼하고 정확하다. 목수와 장인의 품삯이 얼마인지도 남겼다. 국가 예산을 쓰는데 허투루 한게 없다.   

의궤에 나오는 향로. 향을 피우면 신이 내려오신다는데, 어떤 신?


조선왕실의 행차도 꽤나 거창하다.


왕의 관을 동서남북에서 지키는 사수도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그림인데 장례의식이 끝나면 불에 태워버리는 쪽. 의궤에 다행히 그림이 남아있다.


와중에 왕자님 글씨. 삐뚜름한게 귀엽군.


데이트 코스의 마지막은 당연히 맛집.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웨이티하우스레스토랑 떠올랐다. 완탕면과 참깨 소스 진한 열간면, 트러플 향 짙은 딤섬 마고소매를 주문했다. 8800원 딤섬이 고작 세 개라니, 메뉴 셋 시키길 잘했지. 남들은 맛집 가면 가족 생각한다는데, 나는 평소 옆지기 생각을 해본 적 없다. 잘 먹고 다니는게 분명했고, 나와 입맛도 다르니까. 이제는 맛집도 데리고 다녀야 하는구나. #남편을_데리고살만한_이유 중에는 들어가지 않을듯. 맛집은 내 전공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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