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님 초대로 미술관 데이트한다고 화장도 신경쓰고, 십수년 옷장에 모셔뒀던 청자켓도 시도했다. 요즘 살이 좀 빠졌더니 이게 들어가네.
팟캐스트 녹음하느라 폰을 꺼둔 사이, L님이 엄청 연락하셨던 모양. 변수가 생겼고, 결국 나홀로 두 사람 몫을 즐겼다. 다큐까지 재미있어서 미술관에서 3시간을 놀았네.. #에드워드_호퍼 전시회 좋았단 얘기다.
도시의 외로움 전문가 호퍼의 인물들은 접촉이 없더라. 도시 그림인데 사람이 없거나 적거나. 둘 이상 나와도 떨어져 있다. 테이블에서 마주하는 정도면 많이 다정한거다. 호퍼는 자기중심적 인간이었고, 실제 사람들과 교류가 많지 않았다고. 외로움을 에너지로 예술하셨나. 자연을 그리면 집만 나오고 (사우스트루로 동네의 'Road and Houses' 한참 봤다)..
사람이 등장하면 호기심과 상상만 동한다. (Night window 저 붉은 원피스 여자 절묘하다) ..
히치코크 감독에게 영감을 줬다는 NIght shadow 보면 관점이 다르다. (2, 3층은 촬영 불가라 다 퍼왔다)
부인 조세핀이 다른 모델을 용납하지 않았단 얘기도 나오던데, 하여간에 부인을 주구장창 그렸다. 바느질하는 조, 책읽는 조, 잠자는 조, 스케치하는 조.
근데 이분들 1880년대에 태어났지만 현대인들이다. 회화에 대한 호퍼의 녹취도 인상적이지만 영상이 남아있다. 남자들은 여자와 달리 감사할 줄을 모른다는 조의 말에는 뼈가 느껴진다, 10년 동안 그림 한 장 팔고 잊혀져가던 호퍼를 물만난 고기로 만든 당대 미술계의 네트워커 조. 그는 그녀를 만나 그림에도 영향과 영감을 받았는데, 그녀는 호퍼의 매니저로서 꽃피우는 대신 예술가로서 오히려 내리막길이었다는게... 조가 기분이 좋으면 Eddy 라 하고, 맘 상하면 E. 라고 기록한게 흥미롭다. 이 부부는 모든 그림의 특징과 설명을 노트로 정리했는데, 기록에 진심인 나는 진심 감탄했다. 한시간 반 다큐를 앞에 놓치고 잠깐 보다 말줄 알았는데 몰입해서 한시간 좀 넘게 본 듯. 역시 예술가의 삶을 알아야 작품 보는 재미도 커진다.
호퍼는 삽화가로서 광고 삽화나 잡지 표지 오래 그렸다. 30~40대를 그렇게 보냈다. 최고의 예술가도 생업을 위해 다른 일도 했다. 다 괜찮은거다. 세련된 도시인 전문가가 된 것도 패션 광고 그림 그리면서 쌓은 내공이었을테고.. 가터벨트? 광고조차 공들여 네 귀퉁이에 멋쟁이들이 들어갔다.
호텔 고객과 직원들을 위한 잡지 표지도 몹시 고퀄이다. 밥값 넘치게 하셨던 모양이다.
그의 삽화 중 '벽돌공의 휴식'은 드물게 노동자다. 그의 그림은 뭐랄까.. 좀 별천지다. 1950~1960년대는 뉴욕에서 다양한 인종들이 부딪치고, 차별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부글거렸다는데 그는 백인 도시인만 그렸다. 그의 심미안에 가장 아름다운 걸 재창조하는데 집중했겠지. 그가 사랑받는 화가인 것은 또 그 연장선이고.
L님이 보고 싶었던 전시, 표 두장 사서 나까지 불러주신 전시를 어쩌다 혼자 본게 유일한 아쉬움이다. L님과 톡하다가, 서울시립미술관 나오는 길에 셀카도 찍어서 보내드렸다. 내가 오늘 데이트에 진심이었다는 증거로 내밀었지만, 사실 꼭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그냥 살짝 들떠 보인다. 전시가 좋았던게지. #마냐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