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난 거 같아요. 이제는 책을 읽지 않아요. 정보가 담긴 책은 팔리지 않습니다. 사람 마음을 위로하는 책은 팔립니다만, 그런 종류의 책들은 수명이 길지 않고요."
10만부 쯤 팔린 베스트셀러 저자 K쌤은 단호했다. 그런데 그는 또 책을 쓰고 있다. 왜 쓰냐면..
"20년 쯤 뒤에 아, 이런 기록을 남긴 사람이 있었구나 찾아보는 사람도 있을거 같아요. 그렇게 닿는 인연이 있겠죠. 지난번 책도 누가 읽을까 했는데 닿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지난번 벽돌책도 나는 무척 좋아했고, 오늘 들은 다음 책 얘기도 엄청나게 흥미진진하다. 그 어떤 얘기도, 사진도 남기지 말라는 프라이버시 원칙이 분명한 K쌤이니 참지만, 저런 기록을 책으로 남겨주는 분이 있다는게 고마울 따름이다. K쌤이 아니었다면 잊혀지고 사라질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기엔 우리 역사에서 분명 중요한 장면들이다. 근데, 정말 기록하는게 K쌤 뿐인가 싶을 정도.
십수년 인연을 돌아보면 K쌤은 한번도 낙관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늘 글은 다정했다. 다음 세대를 위한 배려와 희망을 담아 기록을 남겼다. 냉정한 판단과 별개로 할 일을 하실 뿐이다. 때로 염치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에 대한 기록은 그 자체로 서늘했다. 기록은 힘이 세다.
정보를 담은 외국 필자의 책, 사람 마음을 달래는 한국 필자의 책. K쌤과 마찬가지로 나는 전자를 좋아한다. 그런데 내 글과 말은 뭔가 꽉꽉 채워져 있어 읽는데 부담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음을 흔드는, 읽기 쉬운 글을 쓰고 싶지만 그건 역량 부족이다. K쌤처럼 오랜 시간 공들여 탐정 마냥 깊게 파들어가는 작가를 목표로 해볼까? 오늘도 몇번이나 감탄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역사의 조각을 파고들면, 다른게 보인다.
역사덕후, 역덕인 K쌤, #북살롱텍스트북 역사책 코너에서 눈이 반짝였다. 이 코너의 모든 책을 다 소장중이라니 역시. 와중에 추천하는게 있냐고 여쭸더니 곧바로 #1493 골라주셨다. 이 벽돌책을 읽으면 되는거구나. 설레인다. 읽을 책은 쌓이고, 나야말로 마감해야 할 원고가 급한 주제에, 그래도 이런 추천은 감사하지.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한 편의 계시록이라는 카피. 월스트리트저널, 사이언스 등의 추천에다 '휘몰아치는 몰입감,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혔다'며 퍼블리셔스 위클리가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니. 2020년에 번역됐지만, 실제 책은 2011년에 쓰였다. 고전의 반열에 든 책이라 봐야할까? 알바가 자꾸 셀프 매출을 올리면 안되지만, 이건 저항할 수 없는 뽐뿌.
#2.
서점 알바로서 호기심 가진 오늘의 두번째 책은 김경화님이 새로 번역한 #자폐_스펙트럼과_하이퍼월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은 가상공간을 적극 활용해 정확하게 의사소통하고, 개성을 한껏 표현한다고 한다. 스스로 장애인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스타일이 다른 사회적 소수자임을 밝힌다고.
가상공간을 연구하며 미국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일본인 저자의 책이다. 역자 경화님도 기자 출신이지만 디지털 미디어로 일본 대학에서 가르치던 연구자다. '아바타라는 수단을 통해 가상세계에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의 세계와 만난 기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마침 함께 서점을 방문한 T의 설명으로는, 위성사진 등을 AI에게 학습시키기 위해 사진을 분류해 라벨링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고, 그 업무에 유난히 탁월한게 자폐증을 가진 이들이라고 한다. 꼼꼼한 매의 눈 정도가 아니라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진을 인식하고 처리하는 분들. 보통 사람들과 소통하는게 어려울 뿐, 가상세계에선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확하게 소통한다는 건 대체 어떤 상황인지 상상한다. 이런 이야기 역시 기록으로 남으니 감사한 일. 이제는 웹소설에 빠져 책을 멀리하는 책순이지만, 이런 책들은 얼마나 기막힌가. (진아님이 나를 호명한 '책순이'라는 단어를 쓸 때, 나는 진아님과 연결된 느낌이 든다.. 누가 뭐라 해도)
#3.
오늘 서점에서 만나기로 미리 약속 잡고 내내 설레였던 분이 있다. 내가 팬심으로 읽어온 10대 칼럼니스트 Y님이 내 책 #홍보가아니라소통입니다 읽고 나를 보자고 했다. 가문의 영광이다. 디지털 미디어에 관심 많은 그를 위해 낮에 챙겨놓은 저 책을 선물했다. 저 하이퍼월드의 세계를 이미 주르르 꿰고 있는 H님은 책의 진가를 알아보는 분. 이렇게 임자가 따로 있구나, 잘 닿았구나 싶을 때 기쁘다.
"한번 갈게요~"하고 진짜 찾아오신 D님은 오랜만에 만났다. 2008년 이직하고 인터넷 세상의 저작권법 이슈를 비롯해 온갖 법제도 현안에서 나를 가르쳐주신 한때 스승. 우리가 실제 함께 일한건 1년이 안된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 꽤 오래 같이 일한줄 알았는데, 관계란 역시 빈도가 아니라 밀도인가.
서로 낯선 이들을 소개하고 한 자리에서 수다 떠는게 살롱의 즐거움이다. 오늘 저녁도 그랬다. 와중에 내가 10대 Y님에게 끝내 #에이징솔로 판거 실화냐. 근데 다양한 관계 맺기에 대한 성찰, 나같은 이가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연결, 10대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좋은 책은 어디서나 통한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서운해 말고, 인연이 닿는 대로 이어가는 수 밖에. 아직까지 기록의 힘을 대체할 만한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