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냐 정혜승 Jul 21. 2023

<오늘도 그림>세상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할거야, 그려봐


이 글은 슬로우뉴스에도 실었다


매일매일 내 인생을 비난했다


“모두 우려했지만 동네서점은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우려한 대로 인생 전체가 흔들릴 만큼 큰 실패와 고통도 겪게 됐다. 외형적으로는 사업의 실패라는 고통, 관계적으로는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갈등에서 오는 두려움, 내적으로는 나라는 인간의 무능하고 저급한 정신의 민낯을 맞닥뜨리며 받은 충격과 실망 등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서울 상암동 서점 북바이북, 기억하는 친구가 많다. 판교점 내고 힘들어졌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런데 잘 몰랐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거니 했다. 늘 빛나는 친구라 잘 극복하고 씩씩하겠거니 했다. 2023년 5월, 김진아님 떠나보내고 많이 울었다. 이 책은 그가 남긴 마지막 기록이다.


전형적으로 잘 사는 척하는 사람이었다는 고백, 누군들. 나도 그랬어, 라는 말은 그때나 이제나 부질 없다. 그의 상처는 깊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사업 실패로 밑바닥을 쳤다고 생각했지만 건강이 무너지고 나니 그건 그저 얄팍한 자기연민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고.

아프다는 얘기도 들었고, 작년 가을 간장게장 먹으며 수다도 떨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괜찮다고 해서 그런줄 알았다. 우리의 김진아가 이렇게 힘든 터널을 보냈는지 몰랐다. 그 고통을 지나 그는 담담히 기록을 남겼지만, 읽는 나는 담담할 수가 없었다. 무심했던 죄가 무겁게 다가온다.


”나는 매일매일 내 인생을 비난했다. 책임져야 할 일이 산더미였는데 블랙홀로 도망을 갔다... 사업도, 몸도 그렇게 쓰러졌다. 자연스럽게.”

3년 전, 그는 일하다가 병원에 실려갔다. 암이 날카로운 통증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때까지 병도 몰라보고 살았구나. 다만 이 책은 그의 실패담이 아니다. 그는 아픈 뒤에야 홀가분해졌다.


그림, 새로운 물결이 다가왔다


”평생 채우기에 급급했던 사람이 텅 비워진 채 하루 종일 누워 있느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됐을 때, ‘그림’이라는 새로운 물결이 슬그머니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는 “미술 시간을 제일 싫어했던 사람이 ‘그림 참 즐겁네요’라며 매일 그리는 사람이 된 이야기”라고 전했다. 시작은 의도하지 않았다. 지쳐서 퇴근한 동생이 웃기게 자는 모습을 보고 장난스럽게 그렸다. 그런데 그 다음날에도 동생은 웃긴 자세로 자고 있었다. 또 그렸다. 같은 회사를 다녔고, 조금 먼저 퇴사해 서점을 시작한 동생은 동지였고 파트너였다. 그 무렵 본인은 ‘미녀 점원’이라며 깔깔 대던 진아님을 기억한다. 두려움과 불안을 일으키는 편도체 대신 사랑과 창의성을 관장하는 전전두피질을 깨우는 건 누구보다 잘하던 이가 진아님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내 영혼은 새롭게 살 궁리를 했다. 날 위협하는 호랑이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서 편도체의 사이렌은 최대한 울리지 않게 하고 전전두피질은 활성화해야 했다. 이때 기괴한 자세로 윙굴며 자는 동생이 눈에 들어와 그림을 그렸고 나는 웃기 시작했다. 내 영혼은 전전두피질을 활성화시킬 방도를 기가 막히게 잘 찾아냈다.”


침대에 누워지내던 시절 그는 자신보다 자유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휘뚜루마뚜루 가볍고 유쾌한 마음으로 ‘뚜루’라고 이름 붙였다. 단발머리가 삐친 귀여운 아이다. 주로 침대에만 있던 그와 달리 뚜루는 일상이 다채로웠다. 그림을 그리고, 식물에 물을 주고, 음악을 듣고, 동네를 걷고..놀랍게도, 뚜루를 그리면서 진아님은 뚜루를 따르기 시작했다. 뚜루가 걸으면 자신도 걷고, 뚜루가 식물에 키우듯 자신도 식집사의 삶을 누렸다.

뚜루의 캐릭터가 완성된 날 360도 회전 컷. 짤은 모두 뚜루의 인스타그램에서 퍼왔다. https://www.instagram.com/ddooroo.sis/

슬금슬금 침대 밖으로 나와 ‘양지달굼(양지받이의 강원도 사투리로 햇빝을 원 없이 쬐는 것이라네!)’도 하고, 조금씩 기운을 내던 그는 부산 일러스트페어의 행사 ‘21일 드로잉 챌린지’에 참여하게 됐다. 21일 간 날마다 그렸다. 이게 되네?

부산 일러스트 페어에 출품했던 뚜루다.

그는 부산 전시를 마치고 직접 ‘미션 드로잉’을 시작했다. 네이버 밴드를 열어 부산에서 만난 친구들을 비롯해 그리는 즐거움을 아는 이들이 하나둘 모였다.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 미션이라든지 뭐든 함께 하며 버린 물건과 깨끗해진 공간을 그렸다. 책도 그림 소재라 일주일에 세권 읽으며 100권 도전하는 클럽도 해봤다. 그의 고백대로 ‘매일 그림을 그리고 매일 책을 읽는 호화로운 삶’이었다. 그림 덕분에 침대를 벗어난 경험을 나누고 싶어서 요양병원에 미션 드로잉 클래스도 제안했다. 1년 남짓 경험이지만 초보야말로 왕초보 마음을 가장 잘 안다는 마음으로 병원들에 다짜고짜 제안 메일을 보냈다. 암 병원 환자들이 각자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은 곧잘 눈물바다, 웃음바다가 됐다. 타인에게 에너지 나누는 것을 가장 잘하던 그는 같은 환우들과 그림을 나눴다.


다정함이 새로운 희망이었다

반려식물에 대한 관심이 같은 ‘식집사’ 친구 임선영 님이 있었다. 진아님은 또다른 식물이 가득한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아름다움에 반했다.


”’와아! 이건 당장 그려야 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테이블과 쿠션을 가져다주고 내 눈앞에 하나씩 화분을 놔줬다. “우리 애들 잘 그려보라고. 모델비는 안 받을게.” 그렇게 꼬박 너덧 시간을 그렸다… 조금 있으니 피자가 나왔다. “먹고 그려. 자고 가도 돼.” 보잘것없는 그림 실력을 보고도 잘한다, 예쁘다, 더 그려줘라, 말해주는 게 정말 고마웠다.”


나도 선영님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반려식물을 사랑했는지도 몰랐고, 그새 진아님을 그렇게 챙기고 있는지 몰랐다. 한 때 제주에서 함께 근무한 두분 진한 시간을 어찌 다 알겠는가. 선영님은 기어이 진아님을 따라서 ‘미션 드로잉’을 시작했다. 이제 그도 그림 그리는 사람이다.

친구 집의 칼라디움을 그리다가 뚜루도 칼라디움 치마를 입었다

작년 가을, 진아님과 선영님, 또다른 옛 동료까지 셋이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진아님 책을 내기로 의기투합했단다. 서로 질문을 던졌고, 조심스럽게 답을 쌓기 시작했다. 다음 뉴스팀장, 카카오 포털담당 부사장을 역임하고 한동안 노는데 집중했던 선영님은 친구를 위해 부득이, 아니 기꺼이 출판사까지 차렸다. 그 시간 내내 진아님 옆에 선영님이 있었다는 것을 책을 보면서 찬찬히 발견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친구를 부축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녹취하고 책을 만드는 내내 곁을 지켰다. 돌연한 결말과 상관 없이 그 다정한 진심에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5월에 진아님이 쓰러졌다. 갑자기 많이 아팠다고 한다. 불과 며칠 만에 그리 떠날줄은 아무도 몰랐다.


진아님이 떠나기 5일 전의 그림이다. 많이 웃는다. 웃는다. 웃는다.

책은 7월 초에 나왔다. 유고집이 될 줄은 작가인 진아님도, 출판사 사장님이 된 선영님도 몰랐다. 떠난 사람 대신 남은 사람에게 더 묵직한 일이 되어버렸다. ‘스토리’를 만드는 ‘리토스’ 출판사 대표이자 마케터이자 인턴까지 혼자 모든 일을 다 하면서 선영님은 7월 어느 토요일 북토크를 열었다. 저자 없는 북토크를 성사시킨 건 남아 있는 이의 진심이다. 선영님은 식집사 답게 아낌없이 꽃을 준비했고, 진아님 그림으로 책갈피, 엽서, 포스터 굿즈까지 넉넉히 만들었다. 이제 막 출발한 초보 출판사 대표인데 나름 큰손이라, 책에도 대범하게 투자했다고 한다. 종이나 인쇄의 퀄리티는 말해 뭐해.

선영님의 조곤조곤한 말에 깔깔 대며 리액션 해주는 진아님의 음성지원이 들리는 듯 했다. 그는 다정한 친구가 평생 안해본 온갖 일에 애쓰는 걸 보면서도 또 웃겠지.

진아님을 기억하는 이들이 기꺼이 달려왔다. 선영님 말대로 한명씩 입장할때 마다 물개박수에 돌고래음향 터져서 깜짝 놀랐다. 이렇게 반가워하는 사람들, 왜 이제 만났을까? 진아님 덕분이다. 진아님 때문이다.

선영님 뒤에서 살짝 찍었다. 설정샷이냐, 연출샷이냐.


“나는 계속 어둠 속을 헤맸지만 그림으로 이야기를 쌓으며 질서를 되찾는 과정은 반짝이는 부스러기들을 따라 빛이 가득한 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없는 길은 만들고 있는 길은 헤매는 여정 동안 조금씩 웃음이 나며 기분이 좋아지길 바란다. 그 기분이 우리를 연결해줄 거라 믿는다.”


삶의 질서가 무너질 때도 있다. 그리고 다시 질서를 되찾기도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림도 그 고리가 된다. 진아님이 증거다. 그림을 그리는대로 이뤄졌다고, 소원 성취가 가능한게 그림이란다. 책의 마지막은 ‘미션’을 남긴다. 1년이라는 안식년이 주어진다면?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 해야 할 일? 나를 살리는 습관? 어떤 상자를 열었다. 뭐가 있을까?.. 30가지 미션을 따라 그림을 그려보면 삶이 달라질까? 진아님이 호들갑 떨면서, 해봐 해봐, 진짜 된다니까요~ 목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절망을 딛고 그림을 통해 반짝이는 순간들을 다시 사랑하게 됐던 사람, 그 다정한 응원을 이제 우리가 이어간다. 진아님 몫까지 뭐든 하기로 했다. 일단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이들에게 안부를 묻자. 어떻게 지내냐고, 혹시 미션 드로잉 들어봤냐고.

북바이북 특유의 기울어진 서가/ 언제나 에너지가 넘쳤던 진아님. 고맙고 미안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철학자의 뱃속> 초식동물 루소, 술꾼 칸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