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많은데, 원고 써야 하는데.. 샐쭉해진 알바 마음을 달래려면 역시 소설이지.
지난주 서점 단골님이 거품 물고 감동하던 책을 펼쳤다.
"상처받기 쉽고 가녀린 여자, 보드라운 손을 가진 요정 같은 여자, 소리 없이 질서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집안의 자상한 숨결, 묵묵히 순종하는 여자, 아무리 돌이켜봐도 어린 시절 내 주변에서 이런 여자들을 찾아볼 수는 없다."..
첫 문장이다. 아니 에르노 1981년 소설 <얼어붙은 여자>.
여자아이는 소녀가 되고, 아가씨가 되고, 아내, 엄마, 며느리가 됐다. 여자아이는 거침 없었고, 뭐든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변 사람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세상 신기한 일들을 발견하고, 서서히 비밀이 생겼지. 인생은 사실 설레임과 긴장의 연속이다. 지나고보니 첫사랑이고, 어느새 호락호락하지 않은 단계로 들어간다.
"내가 저 애 따먹었어." 그렇게 경멸당할 걱정 없이. 신뢰와 평등을 공유하면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그런 남자는 분명 드물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견디고, 기다리고, 혼란은 이어지고.."핑크빛 욕실, 텔레비전, 믹서. 이것은 결코 혼자 얻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남편, 그리고 아이들이 있어야 얻어진다"는 세상이었다.결혼 이후의 여자의 삶은 갑자기 장르가 바뀐다. 멀쩡한 시트콤이나 가족 드라마 같은데 여자는 매몰된다. 자유는 없다.
"왜 둘 중에서 나만 이것저것 해봐야 하나,
닭은 얼마나 오랫동안 삶아야 하는지,
오이의 씨는 제거해야 하는지,
그런 걸 알아보려고 왜 나만 요리책을 탐독해야 하고,
그가 헌법을 공부하는 동안 당근 껍질을 벗기고,
저녁을 먹은 대가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가?"
음식을 하고 집안을 꾸린다는 것은 도대체 끝이 없는 일이다. 부엌에 서 있는 시간 외에 내 머리는 냉장고 재고를 확인하고, 겹치지 않는 메뉴 몇가지로 돌려 막으며, 장을 봐야하고, 식재료를 소분해 정리하고, 순서대로 씻고 다듬고 뭔가를 만들고, 순식간에 비어버린 밥상의 뒷정리가 남는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도 이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똑똑하지도 더 우수하지도 않았던 남자들은 왜 저기서 자유로운가.
"그는 배가 고팠다. 무릎에 냅킨을 펼치고, 뭘 먹을지 결정할 필요 없이, 준비하지도, 휘젓지도, 지켜보지도 않고, 조리 단계마다 냄새를 맡아보지도 않고, 완전히 새로운 음식이 나오는 걸 바라보는 일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집안이 꼴을 갖추고 돌아가는데, 남자는 무엇을 하는가? 손이 많이 가는 일상에 더해 아이를 품은채 고난의 행군을 거쳐 아이를 낳으면 총성없는 전쟁이다. 남자는 어쩌다 애를 재우고, 어쩌다 아이 기저귀를 갈지만 그것은 그녀를 돕는 일이지 자기 일이 아니다. 가사 도우미의 도움을 받는 그녀에게 특권을 누리는 여자라고 남편은 말한다. "그렇다면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부인을 일주일 내내 도우미로 부리는데, 대체 어떤 남자가 특권을 누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어느새 "우리는 자신의 삶과 자신이 바랐던 삶을 비교하지 않고, 다른 여성들의 삶과 비교하기에 이른다. 결코 남자들의 삶과 비교하지 않는다, 이건 대체 무슨 생각인가."
순간 당황했다. 나는 남자들과 경쟁하던 오래된 옛날, 주말엔 골프치고, 종종 사우나에서 숙취를 달래는 아재들과 달리 더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다.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을 덜 포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집집마다 아빠는 바쁘고 엄마는 워킹맘, 직딩맘, 뭐라 부르든 두 가지 일을 모두 해내지 않으면 손가락질이라도 받을 것 마냥 미친듯이 사는 거지? 왜 이런 차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지?
책이 나온지 40년이 넘었다. 그런데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섹스도 하지만, 그 행위 역시, 기대도 모험도 없는 집안일이 되어버렸다는 여자들의 이야기. 이것은 소설이다. 아무리 에니 아르노가 자전적 소설으로 유명한 노벨상 작가라지만, 이것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 같다. 거침없는 문장들마다 비명이 들린다.
"더는 숨길 수 없는 주름, 쇠락이 바로 앞에 와 있다.
이미 나는 그런 얼굴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