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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Aug 27. 2023

호암미술관, 회장님의 정원에 김환기 전시까지 완벽코스

친구 김광섭 시인이 죽었다는 가짜뉴스가 원인이었다. 뉴욕의 김환기 화백은 슬픔을 달래며 친구의 시를 토대로 #어디서_무엇이_되어_다시_만나랴, 그림을 그렸다. 김 시인은 친구가 그런 착각을 할거라고 상상도 못했으니 바로잡아줄 기회도 없었고, 우편 오래 걸리고 국제통화 비싼 시절이라 그랬는지 진실은 늦게 알려졌다. 그림을 다 그릴 동안 몰랐다고.

선, 면에서 점으로 가던 중이었다. 점 마다 상실의 아픔, 그리움이 담겨있다고, 이진숙쌤이 팟빵 매거진 #조용한생활 6월호에서 알려주셨다. 김환기 화백의 삶을 덕분에 알았다. 전남 신안 섬에서 태어나, 부잣집 아들이 환쟁이가 된 사연. 10대엔 서울보다 가깝다는 이유로 일본에 그림 유학을 떠났고, 서울대 교수, 홍대 교수로 편해질 무렵, 40대에 불현듯 파리로 떠나 3년을 머물렀고, 50대에는 뉴욕에서 다시 도전해 또 기존과 다른 추상화의 세계를 창조한 분. '한 점 하늘 김환기 전시' 종료 2주 앞두고 마침내 봤다.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외로운 것을 견디어야 하나 보다. 내 예술만을 생각하기로 하자.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 가는 점... 나흘만에 93"X68" 끝내다. 실패한 것만 같다"

이 작품은 1970년 한국미술대상 대상을 탔다. 뉴욕 가서 뭐하나 궁금해하던 화백이, 달항아리에 미쳐 달과 산을 그리던 화백이 점만 찍어보내서 다들 놀라기도 했다고. 한 벽을 가득 채운 이 점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외롭다. 점 주변으로 번지는 물감처럼 다른 점으로 스며드는 마음인데 외롭다. 화백이 한 점 한 점 어떤 마음으로 그렸을까 상상했다. 서울에서 가진 것 내려놓고 떠난 타향살이에서, 고향의 친구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눈물을 삼키며 그렸을 것만 같다. 뉴욕에서는 하루 16시간 그림만 그리다가 화백도 몸이 상했다는데, 시간을 온통 점으로 채우는 마음이란.


호암미술관은 에버랜드 옆이다. 1982년 개관했다는데 이제야 와봤다. 이병철, 이건희 회장님들의 정원이었을까. 청와대 안쪽 숲보다 더 잘 가꿔진 공간인 건 분명하다. 미술관 들어가는 길에 일단 한 번 놀라고,


회장님 소장품을 공개한 미술관이었으니, 하여간에..


섬 소년이었던 화백의 '섬 이야기'는 동글동글 몽글몽글 하고, 한국전쟁 때 피난 갔던 부산의 '판자집'은 축대가 기울어버린 채 창문마다 사람들이 곤궁한 시절을 버티는 듯 하다.  


한때 달항아리 사느라 가산을 탕진한다는 친구의 걱정을 들었던 김환기, 김향안 부부. 그녀의 원래 이름은 변동림, 시인 이상과 결혼했다가 넉달 만에 남편이 일본으로 갔다가 끝내 요절하는 바람에 과부가 됐고, 이후 딸 셋을 둔 이혼남 김환기를 만났다. 가족들이 재혼을 반대하며 펄펄 뛰니까 본명을 버리고, 남편 따라 김씨 성, 향안으로 이름까지 바꿔 새출발한 분. 남편 뿐 아니라 함께 달항아리를 좋아해 사들인 얘기를 #조용한생활 이진숙쌤 팟캐스트로 듣다가 웃었다. 그 분들이 애지중지하던 바로 그 달항아리다. 그리고 '달과 매화', '달빛교향곡'.


달항아리가 달빛에 빛나서 좋아하셨나. 달에 홀렸던 건 분명하다. '산월', 산과 달이라는데, 이것은 물에 비친 달인가.


짙푸른 점들이 이어지는데 제목이 '하늘과 땅'. 점을 찍지 않은 하얀 능선 만으로 아득하게 갈라진다. 점 그림들 중에 오래 발길 멈춘 작품.


푸르고, 붉은 색 있는 점들에 이어  문득 검은 그림들이 등장한다. 둥글게 퍼져나가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나란히 점이 이어진다. #337 그림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도슨트 앱에서 이것이 죽음과 삶에 대해 사유한 작품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비가 왔나보다.
죽을 날도 가까워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일 하다가 내가 종신수임을 깨닫곤 한다. 늦기는 했으나 자신은 만만... 오늘 입원하게 되서... "

이 그림을 그리고, 그 다음달에 김환기 화백은 숨졌다. 61세. 아까운 나이다. 종신수라는 단어가 가슴에 걸린다. 뉴욕의 거처는 화실과 작은 침실로 구성됐다. 뉴욕의 점 그림들을 보면 혼신을 다해 그림만 그렸구나 싶다.


어릴 적엔 부잣집 아들이라, 첫 부인 본가에 두고 훌훌 유학 떠났던 청년. 반대하는 부친 몰래 떠나서 어머니에게 생활비 보내달라 하던 그는 귀국 후 화랑부터 열었다고 한다. 더 좋은 화가들이 밥벌이를 하는게 중요하다고 믿었다나. 키 185 훤칠했던 그는 더 편하게 살아도 됐을텐데, 더 많은 영감을 찾아 치열하게 부딪쳤다. 해외 생활은 고달팠고, 함께 전시된 편지를 보면 고국에 두고 온 아이들을 무척 그리워했다. 늘 그렇지만, 그가 남긴 그림보다 그의 삶 자체가 울고 웃게 만드는 이야기다.


김환기 화백의 점과 선, 면을 보고 나왔더니 정원 계단의 무늬가 다 그의 그림처럼 보인다. 와우...


정원의 19세기 마애보살좌상에 감탄했더니, 바로 옆 마애보살입상은 11~12세기 고려의 물건이다. 아이고, 여기 회장님 정원이었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9~10세기 통일신라 작품이란다.


정자에 들어가지 못해 아쉬웠지만, 정자에 앉았다면 연못의 연꽃과 멀리 산, 저수지를 볼 수 있었겠지. 물가의 산책로가 호젓하니 좋다. 동네 주민들은 미술관이 아니라 공원으로 놀러온다지. 정원은, 이런 정원은 공공 서비스라고 함께 간 C님이 말했다. 인생샷 찍어준다고 계속 나를 쫓는 L님을 나도 찍어본다. 아름다운 사람을 피사체로 만났더니 내가 괜찮은 찍사 마냥 신났다.


귀여운 양을 비롯해 조각상들이 곳곳에. 이거이거 귀여운 수준.


장-미셸 오토니에의 황금연꽃과 황금목걸이 같은 직품이 난데 없이 정자 앞 연못에 있는 마당에!


15분 거리 #희락보리. 1시 넘어 도착했는데 30분 대기하라고 해서, 그 앞 하나로마트에서 저렴한 채소 장보고 오니 좋다. 고등어구이, 양념게장 곁들인 보리밥과 청국장은 딱 기대한 그 맛. 남기지 않고 싹싹 먹어치웠다. 전시에 초대해주더니, 점심까지 후딱 가서 계산해버린 L님. 이게 이게 그럴 일은 아닌데ㅎㅎ 염치 따위 따질 때가 아니지. 그저 그 마음 예쁘고 고마우면 됐다. 조만간 마냐밥상으로 갚아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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