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미다졸람(항불안제)이 들어간다. 긴장을 풀어주고 기분이 좋아지면서 살짝 졸리다가 선잠에 빠져든다. 이어 리도케인(마취제)은 혈관에 감각이 없도록 한다. 이미 잠들었으면 필요 없겠지만, 다른 약물들이 조금 따끔할 수 있기 때문에 편안함을 100% 보장하는 조치다. 그다음은 프로포폴이다. 많이 쓰면 깊은 잠으로, 코마 상태로 빠져든다. 호흡의 간격이 길어지고 얕아지고, 끝내 멈춘다. 마지막 로쿠로늄은 근육을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약이다. 프로포폴로 사실 대부분 숨을 거두지만, 심장을 확실히 멈추게 만든다. 첫 번째 약물부터 대략 8~10분 후 ‘의료조력사망’이 끝난다.
책의 원제는 ‘This Is Assisted Dying’(이것이 조력사망이다). 2016년 의료조력사망(MAiD, Medical assistance in Dying)이 합법화된 캐나다에서 조력사망을 돕던 의사의 기록이다. 가정의학과 10년, 산부인과 12년 경력에 이어 새로운 도전에 나선 스테파니 그린은 차분하게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돕는 의사로서 1년여 경험을 정리했다. 우리는 ‘안락사’라고 부르지만, 국가마다 이름도, 방법도 다르다. 미국은 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이라고도 부른다. 고민도, 철학의 출발점도 다 다르다. 다만 사연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인간의 일이란.
캐나다 의료조력사망(MAiD) 조건은 다음과 같다.
18세 이상이어야 한다.
스스로 의사결정 능력이 있어야 하고,
‘위중하고 치료 불가능한’ 고통을 겪는 환자이어야 한다.
살 날이 얼마 남았는지 여부는 따지지 않는다. 실제로는 통증 탓에 조력사망을 결정하는 경우는 의외로 적다. 환자들은 삶의 질이 상당히 떨어졌거나, 삶에 기쁨이나 의미를 주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을 호소했다.
“내가 나의 죽음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이 몸은 누구의 몸이란 말입니까? 누가 내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거죠?” (루게릭 병 환자 수 로드리게스, 1991년)
1991년 루게릭 병 환자 수 로드리게스의 말이다. 그는 조력사망을 금지한 법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1993년 캐나다 대법원은 4대 5로 부결했다. 조력사망 금지가 삶에 대한 권리, 자유, 위중하고 치료 불가능한 병을 앓는 이의 안전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소송은 2011년에야 다시 제기됐다. 원고였던 89세 케이 카터는 결국 캐나다 대신 스위스에서 마지막을 맞이했으나 2012년 의료조력사망 금지가 개인의 헌법적 권리에 위반된다는 1심 판결이 나왔다. 판결문만 395쪽에 달했다. 당시 여론은 압도적으로 조력사망을 지지했다. 가톨릭 신도조차 찬성 비율이 83%에 달했다.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뒤집어졌다가 2015년 대법원에서 만장일치로 다시 뒤집혔다.
“나는 친구들이 마지막 순간에 침대에서..의식이 없는 채로..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걸 보았습니다. 나 자신이나 가족이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아요. 내 삶이 끝났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 삶이 어떻게 끝날지 내가 스스로 맡아서 책임지고 싶어요.” (케이 카터)
저자가 만난 환자들은 대부분 담담하게 의사를 밝혔다. 저자는 환자를 직접 방문해 상담할 때마다 상대가 비범하다고 느꼈다. 그 가족들이 서로 사랑과 지지를 표현하는 모습은 늘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공격적 치료를 이어가는 것이 의미 없거나, 심지어 모욕적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법적 대응을 운운하는 가족도 있었고, 환자의 결정은 교회의 뜻에 반한다며 길길이 뛰는 이도 있었지만 대체로 환자의 뜻을 존중했다.
상담 끝에 조력사망에 적합하다고 통보해주는 자체가 환자의 불안을 덜어주기도 했다.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더는 두려워하지 않고, 남은 삶에 집중하게 되는 분기점이다.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마지막까지 의지를 갖는 일이다. 그도 매번 생각하게 됐다. 나는 어떤 죽음을 원하는가? 이 질문은 독자에게도 전염된다. 나는 어떤 풍경을 상상하는가?
스테파니 그린도 처음부터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저 생명의 시작을 돕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하지만 의료조력사망 합법화 이후,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컨퍼런스까지 쫓아가서 결국 결심했다. 누군가의 생명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지막 소망을 이뤄주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업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1년 여 현장 경험이 그에게 새로운 통찰을 부여했다. 처치 자체야 주삿바늘 꽂고 8~10분이면 끝나는 일이지만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는 세심한 사전 상담부터 모든 과정이 조심스러웠고, 현장의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환자들은 보통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줄 가족과 친구들을 불렀고, 공들여 선정한 ‘플레이 리스트’의 음악을 들려줬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는 아리아 ‘네순 도르마’부터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노래까지 다양했다. 마지막 포옹, 다정한 속삭임의 시간이었다. 한 환자의 경우, 약물을 주입한 직후 막내딸이 “딸기잼”이라고 한마디 내뱉자 “크리스마스 케이크”, “모두를 위한 울 니트 양말”, “예고도 없이 손주들 데려가기”, “토마토 통조림 만들기”, 키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멋진 시간이었다.
어떤 할머니는 약물 투입 직전 손자에게 수십 년 동안 참은 말을 쏟아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 할머니 돈을 훔치고, 기회를 몽땅 날리고, 술, 담배, 약물!”.. 손자는 울면서 용서를 구했고, 할머니는 떠났다. 남편의 심장이 진짜 멈췄는지, 유독 확인 또 확인한 부인이 있었다. 저자는 별 생각 없었지만, 사례를 공유한 뒤 동료가 가정 학대 피해자 아니었겠냐는 의심을 꺼냈다. 알 수 없는 인생, 마지막까지 그렇다.
합법화 초기 이 일을 시작한 의사들은 서로 시행착오를 나누며 적응했다. 폰 벨소리를 무음으로 하라는 안내도 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체크리스트에 포함됐다. 정부가 의료비를 부담하는 캐나다에서 관련 비용을 청구할 때, 사인을 ‘의료조력사망(MAiD)’이라고 적을 것인지, 환자의 기저질환으로 할지 정리되지 않은 시기였다.
어떤 주에서는 ‘자살’로 적도록 했다. ‘위중하고 치료 불가능한 상태’는 늘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심각한데 질병이 확실하지 않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계선의 문제들을 정의하고, 결정하고, 검증할 책임도 모호했다. 이 기록은 이같은 구체적 사례들을 정리한 것으로도 유용하다. 즉, 이제 시작이라는 얘기다.
각국 현황도 흥미로운데 미국은 캐나다와 비슷한 조건이지만, ‘6개월 내 사망이 예상되는 경우’를 조건으로 추가한다. 의료전문가 조력이 불가능하고, 환자가 직접 집행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주에서는 환자가 똑바로 앉을 수 있고, 손으로 컵을 쥐거나 적어도 빨대로 삼킬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은 조력사망을 인간의 권리나 의사의 철학 문제로 보지 않고, 환자 본인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여부보다 투표자나 정치인에게 안전한 쪽으로 선호한다는 게 그린의 분석이다.
벨기에는 ‘의학적으로 가망이 없는 상황’에 집중한다. 스위스는 약물을 자가 투여하는 과정에서 조력자에게 이기적 동기가 없을 것을 요구한다. 캐나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는 자기투여 물약이나 임상의가 투여하는 정맥주사 중에 선택하는데 대부분 후자를 선호한다.
개인적으로 놀란 지점은 이 제도의 도입 속도다. 미국은 2016년 당시 조력사망을 허가하는 주가 5개에 불과했으나 금방 12개로 늘었고, 2021년 기준 40개 주가 법제화를 고려하고 있다. 이 책이 쓰여지는 시점에서도 미국인 4명 중 1명은 조력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 더는 스위스에서나 가능한 특이하고 비싼 경험이 아니다.
이 책은 독서클럽 #트레바리 #기막힌논픽션 에서 함께 읽었다. 아래는 나의 발제다.
우선 죽음에 관한 생각을 나눠보죠 존엄함 죽음을 생각해본 적 있나요? 책을 읽고 달라진 지점이 있을까요? 신체와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면 존엄하지 않아요? 장애인들의 존엄성을 고려하면서, 당신이 생각하는 존엄성은 어디까지인가요? 캐나다의 조건이면 될까요? 조력사망의 구체적 조건을 더 따져본다면요? 나이 제한은? 치매 환자는? 생명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은 책무? 권리? 자유? 개인의 선택을 국가가 제한하는 것은 괜찮아요? 다정한 이들과 함께? 불화든 갈등이든 죽음 앞에 풀리려나요?
조력사망의 미래는 어떨까요. 제도에 대한 반발은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이유 중 어느 쪽이 뜨거울까요? 조력사망 조차 교육수준 높은 부유한 백인들의 자유라는데, 죽음의 불평등 문제는 괜찮을까요? 고려장 마냥 조력자살이 도입될 가능성은요? 서구와 아시아 문화권에서 다르게 보는 것 같아요? 자살조차 합법화되는 상황이 올까요?
토론을 통해 확인한 것은 모두 본인의 조력사망에 우호적인데, 가족이 원한다면 주저할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괜찮은데 가족은 안 된다고? 조력사망은 물론, 조력자살, 조력살해가 비즈니스가 되고 블랙마켓이 생길 수 있다, 가스라이팅이 결합된 보험치정극이 우려된다는 말도 있었지만, 우리가 합법화 과정을 목격할 가능성에는 이견이 없었다. 단순히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사회적 시선, 법제도에 대해 철학적 논의가 더 필요하다. 죽음에 관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함께 평온해지는 기분이 묘했다.
책이 주는 정보도, 여운도 좋아서 기어이 이 책을 팟캐스트에서 소개할 때, 책 한 권을 추가했다. 이번에는 한국의 의사가 쓴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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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죽음, 담담하게 작별하는 순간을 상상하니, 결국 삶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우는 것만 선명한 과제로 남는다. 죽음을 떠올리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니, 또 하나의 교훈이다. 천방지축 무례하고 세상 겁 없는 인간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게 분명하다. 죽음을 멀리하고 피할 게 아니라, 삶의 핵심이라니 역시 인생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