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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Sep 27. 2023

<브러쉬업 라이프>, 인생 n회차가 이래도 된다고?

K선배가 톡방에서 수다 떨던 중 <브러쉬업 라이프> 몰입을 위해 사라졌다. 제목도 낯설고, 뜻도 모르겠고.. 그런데 눈높은 선배가 훅 빠질 만큼 재미있다고? 여주인공이 안도 사쿠라? <어느 가족>의 그녀? 회귀물이라고요? 왓챠 고고.(웨이브에도 있단다)


인생 2회차면, 유명한 성공담이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이라고, 미래를 안다는 것은 초능력 마냥 막강했다. 그런데 이 여자 아사미(안도 사쿠라)의 2회차는 좀 달랐다. 30대 중반 시청 직원 아사미는 사고로 죽은 뒤 이상한 오피스에 도착했다. 온통 하얀 공간인 저승 안내창구에서 그녀는 다음 생이 과테말라의 큰개미핥기로 내정됐다는 통보를 듣는다. 덕이 모자라 인간으로 환생할 수 없다니. 당황한 아사미에게 당황한듯 한 안내창구 직원은 이전 생을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옵션을 제시했다. 그까이꺼, 2회차에선 덕을 제대로 쌓으면 되지!

드라마는 여성의 속내를 디테일하게 그려내는데, 당연히 여자일거라 생각한 작가가 남자. 그것도 안내창구의 저 분이란다.


'브러쉬 업', 제대로 광내고 문지르면 이번 생은 좀 더 나아질까? 전생의 기억을 갖고 n차 인생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디테일한 설정이 웃음 포인트. 그녀는 갓 태어난 아기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부모님이 놀랄까봐 말할 줄 안다는 것을 숨기고 평범한 아기 코스프레를 하는 아사미. 지루한 아기 일상에서 유일한 낙은 멀리 켜져 있는 TV 정도다. 간신히 유치원생으로 자란 그녀의 첫번째 덕업 프로젝트는 지난 생에 아빠의 불륜으로 이사 가버린 친구를 돕는 것. 그 아빠가 유치원 선생님과 불륜에 빠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저지한다. 여기서 이 드라마의 비범함이 시작된다. 인생 2회차면, 나라를 구하거나 노벨상 수상자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아사미는 소소한 일상에서 최선을 다한다. '드라마로 만든다면 재미 없는' 인생이지만 그녀에겐 중요한 일의 우선순위가 달랐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선생님이지만 부당한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돕거나, 인생의 실패를 거듭하는 친구의 미래를 알면서도 그 실패를 무사히 도와야 하는 설정은 몹시 현실적이다. 할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거짓말을 동원하거나 다른 수를 써야 하는 그녀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미션을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손에 땀을 쥐는 스릴? 이렇게 몰입하게 된다고? 거창하지 않은데 심장 쫄깃하다.

하지만 인생 2회차도 쉽지 않다. 두번 살아도 죽음이 예고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등어? 아직 인간이 되려면 멀었다. 부득이 3회차 도전. 다시 갓난아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애어른 꼬마의 한숨이 깊지만, 이제는 조금 능숙하게 2회차 시행착오를 생략한다. 평범한 인간의 하찮은 시도가 여러 사람을 구하는 위대한 업적이란 것은 우리만 알고 있다. 직업을 무엇으로 바꾸든, 소소하게 성공하든 아니든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이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작은 인과관계가 모여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된다.

인생을 거듭하는 그녀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친구들이다. 대단한 우정이랄 것도 없다. 요즘 뜨는 드라마에 대해 떠들고, 예쁜 스티커를 교환하고, 인생네컷 같은 사진을 남기고, 과자 취향을 확인하며 깔깔대며 수다떠는 일이 전부다. 이게 어릴적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가장 행복한 기억들이다. 삶은 웅장한 업적이 아니라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하는 일상으로 계속 '브러쉬업'한다. 아사미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인생을 거듭 반복하지만 그 오랜 시간을 버텨낸 것도 전적으로 친구들 덕분이다. 1회차에 헤어졌던 남자친구가 2회차에서는 자신과 엮이지 않고 다른 미래를 만든 것에 쓴웃음이 나오지만 그 뿐이다. 놀랍게도 아사미의 '브러쉬업 라이프'에는 남자가 중요하지 않다. 사랑과 연애, 결혼이 아니라 우정 만으로 생이 온갖 색깔로 꽉 찬 느낌이다. 우정이 이렇게 어마어마하다.


보는 내내 슬며시 웃음이 이어지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드라마. 10회로 끝나는 게 아쉬워서 아껴보고 싶었다. 이렇게 홀딱 빠지도록 만든 것은 안도 사쿠라의 연기도 결정타였다. 86년생 이 배우는 이미 <어느 가족>에서 알아봤지만 전형적 미인이 아닌데 표정마다 다른 색으로 빛난다. 자연스러운 눈빛, 말투, 밥을 먹고, 걸어가는 일상의 모든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생 N회차 마다 다른 설정으로 등장하는데 그녀의 헤어스타일, 옷을 다 따라하고 싶어진 것도 내게는 드문 경험이다. 설정도, 디테일한 대사도, 연출도 인정하지만, 안도 사쿠라에게 내가 미쳤다.


그래서, 한 편 더 봤다. <백엔의 사랑>. 넷플릭스.



꿈도, 직업도, 돈도 없다. 어쩔래? 국내 마케팅 문구가 이랬구나. 인생노답녀의 개과천선 프로젝트라.. 어쩌다보니 대학 졸업 후 백수로서 30대가 되어버린 평범한 여자다. 굳이 인생노답녀라 부르는 우리의 시선이 유감이면서도 속으로 찔린다. 홧김에 독립해서 백엔샵 알바를 시작한 그녀에게 인생은 에누리가 없다. 우울증에 걸린 점장이나 변태 같은 동료,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훔쳐가는 고숙자, 바나나만 사가는 이상한 손님, 모두에게 인생은 까칠하다. 그녀가 처한 현실은 구질구질하고 겪는 일마다 기가 막힌다.

인생에 별다른 의지도 없고, 게으르고 무기력한 이치코를 연기하는 안도 사쿠라는 전혀 배우같지 않다. 부스스한 차림에 살찐 몸집조차 리얼하다. 그런데 어쩌다 시작한 권투가 그녀를 바꾼다. 어쩌다 시작한 연애보다 권투, 그 루틴이 그녀를 달라지게 만들었다. 이 영화로 2016년 일본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녀는 영화 후반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데, 정말 미쳤다.

콧대 높은 사회에서 루저 마냥 찌그러진 이들이 무게중심을 찾는 것은 세상이 달라지는 경험이다. 영화는 세속적 성공공식, 드라마같은 승부수를 다루지 않는 대신, 각자 살아가고, 버텨내는 힘, 그 이유를 묵묵히 보여준다. 개봉 당시 좀 우울해보여서 피했는데, 안도 사쿠라의 마법에 빠져들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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