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땅에서 착한 사람을 도통 찾기 어려웠던 신들은 간신히 착한 순덕을 만났다. 덩치가 곰처럼 큰 여자 순덕에게 계속 착하게 살라며 돈을 줬다. 순덕은 그 돈으로 작은 가게를 열었는데... 세상엔 악귀같은 사람들 뿐인가? 착한 사람 등쳐먹겠다는 이들이 영악한 것인가?
알고보면 착하게만 사는 건 불가능한 세상. 그러나 약아빠지고 닳고 닳은 악인들도 그러고 싶었을까? 소리꾼 이자람은 질문을 던진다. 그게 꼭 그들 탓이냐고 묻는다. #사천가 한자락이다. 브레히트 ’사천의 선인‘을 판소리로 만든 이자람의 사천가는 30년 전에 봤던 브레히트를 다시 읽고 싶게 만든다. 저 착한 여자에게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생겼더라, 신이 되었다가, 순덕이 되었다가, 철면피 악인이 차례로 되었다가, 표정과 소리, 몸짓만으로 사람이 달라지는 이자람의 연기는 신들렸다는 느낌 그대로다. 인간세상 희로애락이 뭔지 끊임없이 얼굴을 바꾸는 이자람을 통해 새롭게 만난다.
15일 공연은 갈라쇼. 이자람의 대표작 #사천가, #억척가 일부를 이어서 보여줬다. 메시지가 묘하게 이어지는 건 사람사는 세상, 짐작하는 그대로인데다 전쟁의 풍경이 새삼 현실적이기 때문이리라. 순종만 하던 김순종이 아이 셋을 데리고 대륙을 가로지르며 김안나, 김억척이 되는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가 없다. 김억척의 통곡은 소리꾼 이자람의 절창으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다. 감정적으로 끝까지 몰아붙이는 장면에서 숨도 못쉴 만큼 얼어붙었다가, 다시 얼굴을 바꾼 소리꾼 이자람의 능청에 되살아났다. 억척가 이 대목은 마음이 힘들다며 심봉사가 눈을 번쩍 뜬 장면 판소리 한 자락으로 마무리해준 그녀야말로 이날 세종문화회관의 선인.
이자람은 단순히 소리를 잘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휘젓고 다닌다. 착하든 악하든 사람사는 풍경의 아이러니를 슬쩍 돌직구로 꽂아버린다. 얼씨구, 절로 추임새가 나오도록 사람을 흔들고, 꼼짝 못하게 사로잡는다. 단순한 손짓 어깨짓 한번에 천의 얼굴로 변신하며 혼자 무대와 극장 전체를 장악하는 예술가다. 가늘게 줄어들었다 미친듯이 커졌다가 꺽이는 소리, 공간을 찢어버리는 소리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가볍게 손 흔들고 무대를 떠난 마지막 퍼포먼스까지 얄미울만큼 환상적이었다.
평생 덕질이라고 모르던 내가 여름에 처음 그녀의 공연 #이방인의_노래 를 만났고, 가을에 전주까지 가서 #노인과_바다 푹 빠졌고, 초겨울 갈라쇼까지 찾았다. 함께 간 언니들은 예전 사천가, 억척가 공연 각각 소름돋게 멋졌다고 하는데, 그 시절 난 뭐 했나 몰라. 지금이라도 갈라쇼 봐서 다행이다. 판소리라는 낯선 세계를 쉽고 매혹적으로 전하는 소리꾼을 만나 행복했다.
수능치는 학생들, 그 가족들 애타는 하루. 다채로운 재능이 빛나는 세상은 부조리에 질문하는 능력만 갖추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지금은 중요한게 따로 있는 시기. 각자 최선을, 그로 인한 평온을 기원합니다.
온니들 몰래 인증샷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