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여긴 혼자 와도 좋겠다!"
둘이 같이 오니 좋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중년 남자의 쎈스가 저 모양이라니, 밖에 내놓아도 걱정이 된다? 안된다? 뒤늦게 '혼자 오면'이 아니라, '혼자 와도'라며, 해명하지만...쯧쯧.
제주 절물은 나의 최애 숲 중 하나인데, 남편과 온 것은 처음이다. 클라이언트, 갑님, 동료, 친구와 왔을 뿐이다.
둘이 또 놀러오다니. 중년 부부, 이래도 되나 싶은데 이 남자 쎈쓰가 또 어지간해야 말이지.
사진이 맘에 안들어 "나, 요즘 삭았나봐. 사진이 다 이상해"라고 했더니...
"당신도 보톡스 맞아봐~"라고 천진난만한 답변인지, 제안인지. 이럴때 모범답안은 무슨 소리냐, 넌 여전히 예쁘다 운운. 뭐 이런거 아닌가? 보톡스로 정비하라고?
며칠 전 기차에서 통로를 지나가던 젊은 여성이 "나 지금 행복한 기분이야"라고 외쳤다. 일행인 듯한 남자와 함께 해서 좋다는 것인지, 나들이가 좋은 것인지. 괜히 행복이란 무엇인가 잠시 개똥철학으로 빠졌다.
뭔들 어딘들, 너와 함께라면 모든게 달라질 거라고 신해철 옵바는 '일상으로의 초대'에서 달콤하게 읊조렸다. 일상을 넘어 여행까지 왔으니 이건 팔짝팔짝 신나야 하는데, 팔짝팔짝 뛸 노릇인건 비슷.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생각에 잠길 때
요즘엔 뭔가 텅빈 것 같아
지금의 난 누군가 필요한 것 같아
...
내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게 새로울 거야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게 달라질 거야
저런 설레임은 과연 복원 가능한 것인가? 옆지기의 쓸모를 찾는 여정은 어디까지인가?
동해보다 파도는 잔잔하구나, 쪽빛 바다 예쁘네, 어쩌고.. 감상에 빠질 무렵 깜짝 놀랐다. 아니 지금 저 분이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었다가 다시 들어간거야?
제주 표선 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 분들을 목격했다. 동그란 공만 무슨 표식처럼 떠있는 줄 알았는데 그 옆에 사람이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서울보다 따뜻하지만 옷을 몇겹으로 껴입고 바닷바람이 차다는 둥 산책하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밥벌이는 고단해서 숭고하다는 둥 말만 떠벌리는 내가 차가운 바다로 잠수하는 분들을 어찌 이해할까.
대충 지나쳤던 해녀들의 쉼터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제주의 검은 돌로 벽을 올리고 둥근 지붕을 얹은 해녀들의 공간. 해녀 쉼터 뒷편에는 작은 스쿠터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저 차가운 바다에서 나와 바위와 돌 틈으로 종종 걸음 올라오면, 물기를 닦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뒤 스쿠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시겠구나. 그분들도 열심히 일한 만큼 가끔 건너편 호사로운 호텔에 들릴 수 있다면 좋을텐데. 호텔 식당에서 만났던 부티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운좋게 그런 숙소에서 묵는 주제에 가식과 위선 같지만, 우리 공동체 계급의 벽은 시간이 갈수록 더 난감하다.
와중에 호텔 조식은 간만에 흡족하고 행복한 호사였다. 우리만 누리는게 괜히 미안하다는 생각은 사실 아침부터 했다. 가성비 중요한 나는 이런 호텔 잡지 못했을텐데, 옆지기 절친이 숙박권을 넘겨줬다. 바빠서 제주 다녀올 시간이 없다는 이유였다. 옆지기 친구들 중 평일에 훌쩍 여행이 가능한 건 부부 둘이 놀고 있는 우리 정도. 성공도 부도 다 행복하기 위해 쌓을텐데 정작 잘 나가는 분들은 시간이 별로 없다.
어릴적 소울메이트 친구를 십수년 만에 지난주 만났다. 뉴요커가 된 그는 월가애서 일하며 매년 서울에 출장왔다면서도 바빠서 일만 하다 갔다고 했다. 이번엔 나의 암 소식에 죽기 전에 얼굴 봐야지 싶어 연락했단다. 어렵게 시간을 쪼개 차를 마셨다. 친구는 96년 이후 지금까지 새벽 6시에 출근해 저녁 6시 퇴근. 저녁 7~10시는 아시아 시장 보느라 집에서 일한단다. 야야. 그건 우리 젊을 때나 하는거지. 너 그러다 쓰러진다. 잔소리는 해서 뭐하나. 자기도 아는데 멈출 수 없다고 했다.
넘어져서, 아파서 속도를 늦춘 내가 운이 좋다고 Y온니가 말했다. 안그랬으면 계속 미친듯이 달리고 있을 거라나? 책을 썼으니 멈춘 건 아니지만, 속도가 느려진 건 맞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노동하는 이들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확보하는가? 성공하는 이들은? 인간다운 삶은 뭔데? 또다시 삼천포로 빠지는 #마냐여행
오늘은 출사나온 쌤과 교육생 모드였다. 그래, 당신 사진 잘 찍는다. 인정한다. 1, 3번은 그의 샷. 2, 4번은 같은 자리 내 찍ㅠㅠ 이게 갤럭시와 아이폰 차이도 있는걸까. 그래도 해질 무렵 검은 숲 사진과 달은 쫌 괜찮게 찍지 않았나?
사려니숲길도 손님들 모시고 출장길에만 들리던 곳이라 사적 여행은 처음이었다. 제주도민 친구의 꿀팁에 따라 사려니숲길 붉은오름 입구 쪽으로 갔다. 삼나무가 빽빽하게 솟아오른 산책로로 숲이 시작된다. 잘 쓴 글은 설명보다 묘사라는데, 이 숲을 뭐라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볕이 쏟아지면서 빛과 그림자가 옛날 명화처럼 색감을 뽐냈다. 푹신한 흙길은 발걸음을 가볍게 도워줬다. 바람 거세던 바닷가와 달리 숲은 고요하고 따뜻했다. 숨결마다 청량함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숲의 기운을 온전히 받는 것은 축복같은 시간이다.
게다가 오늘 나는 숲의 품에 안기기 전, 친구 품에 안겼다. 제주 사는 친구를 수십년 만에 만났다. 중학교 친구 중에 172로 가장 키가 컸던 H. 혹시나 했더니 고등학교 때 176이 됐다고? 아들이 190이라고? 맑고 순했던 친구는 세월 지나도 그대로. 어릴적 친구와 수다는 이렇게 마냥 웃을 수 있는 거구만. 몇년 째 온라인에서만 좋아요 하던 친구를 전날 약속 잡아 만났는데 #MBC를날리면 #정부가없다 두 권을 들고 나왔다! 네가 먹는 유기농 사과식초까지 챙겨오다니 친구야! 잊고 있던 이름들을 소환했고, 연락 끊긴 그이들이 어찌 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동안 바쁘다고 무심했던 나같은 인간에게도 어릴적 친구가 있었구나. 너는 어떻게 우리 부부 사진도 너처럼 다리 길게 찍어주니ㅋㅋ
이틀은 숲을 걸었으니 마지막 날은 뭐할지 오전에 찾기 시작했다. 문득 제주 서점을 검색했더니, 오오. 동선이 완벽하다. 표선에서 동부 해안도로로 쭉 올라가면서 차례로 들리면 된다.
요건 별도 정리
그리고.. 제주 먹방.
예전 내사랑 ㅇㄹ국수는 1시간 이상 기다릴게 뻔해서 공항 부근 검색한 #국수만찬. 앞에 다섯팀이라면 양호. 휘릭 리뷰 몇으로 골랐지만 친절하고 맛있고 푸짐. 찾아낸 나를 칭찬한다. 뽀얀 국물이 진하고, 김과 깨, 고기 듬뿍 담아 면발 굵은 중면이 가득이라 좀 남겼다. 8500원. 돔베고기 따로 안시키길 잘했다.
저녁은 숙박권 바우처로 해비치 별관 느낌 #다랑쉬. 테마를 계속 바꾼다는데 요즘은 멕시코 요리다. 멕시칸 코스(6.5만)는 처음인데, 맛 없을리 없다는 믿음을 넘어 도미 튀김을 올린 타코 등모든 요리에 흡족했다. 무알콜 스파클링 풀문 적당히 달달했고 기념일도 아닌데 남편과 격식 갖춘 디너라니.
이틀 연속 호텔 조식은 진리. 비싸서 평소 엄두를 내지 않을뿐 숙박권 포함이면 넙죽. 차가운 채소 종류로만 한 접시 가득 채워 시작하면 기분까지 좋다. 달큰한 당근 샐러드, 당근싫어 인간인 내 맘에 들다니 레서피 궁금하고.. 남편 안먹는 내장넣은 전복죽 이럴때 먹어야지. 김과 깨 올려 고소하고 고소했다.
제주시의 친구가 달려온다는데 우리는 조금이라도 북쪽으로 올라가야지. 우도 선착장 앞 #소금바치순이네 돌문어볶음 맛집이다. 소짜(3만)에 보말국(1만원) 주문했는데 셋이서 남길 만큼 푸짐했다. 매운거 못먹는 내가 감당가능한 수준의 매콤함에 불맛. 돌문어와 깻잎도 넉넉하고 소면까지 이것은 언니들의 취향저격메뉴. 보말미역국은 진한 풍미에 녹는다. 반찬 중에 살짝 향긋한 초록초록 아이는 번행초. 바닷가 모래땅에서 난다는데 싹싹 비우고 한번 더 청했다.
점심 식당은 사실 친구가 고른 카페 주변에서 찾았다. 즉 오늘의 목적지는 종달리 #꼬스뗀뇨. 입구부터 돌이 예사롭지 않더니만 공간 광활한 제주 스타일. 통창 너머 푸른 바다가 눈부시다. 제주에 카페가 1700개? 그 중 이런 스타일도 여럿이라고? 무튼 서울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공간이다. 친구와 즐거운 수다로 기억해야지ㅎ
사려니숲길을 걷고 표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저녁은 #나목도식당. 예전 출장길에 이쪽으로 올 일이 없어 오랫동안 눈독만 들였던 곳인데 그새 방송 타고 유명해진 집. 흑돼지 목살이 떨어져 삼겹살로. 솔직히 돼지는 서울의 좋은 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날 나의 혀를 즐겁게 한 것은 둘이 한 그릇 나눠먹은 순대백반. 몸국처럼 해초와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갔는데 당면순대가 아니라 피순대가 메인이다. 이렇게 진한 맛은 반칙 같은 재미가 있다.
마지막 날 점심은 김영갑갤러리 부근에서 보말김밥을 노렸는데 개인 사정 휴무ㅠ 급히 검색했더니 옆에 보밀칼국수 집이 있다. #성산봄죽칼국수 본점. 2인 셋트 메뉴(3.3만원)는 바로 부쳐낸 한치유채전, 감귤을 반죽에 섞었다는 보말칼국수, 보말죽이다. 다 괜찮았지만 이 집은 바닷가 뷰가 환싱적이다. 밥 먹고 쪼르르 해변으로 내려가 바다 구경. 이때 날씨가 영상 19도였다ㅎㅎ 이틀 쌀쌀하더니만 마지막날이 원래 그렇지.
제주를 떠나기 전 마지막 만찬은 각재기국을 골랐다. #앞뱅디식당 오랜만인데 맛은 여전했다. 멜튀김 멜조림 없이 딱 국밥만. 그래도 끓여낸 쌈장에 배추 넉넉하고 고등어구이 한 토막은 기본이다. 각재기(전갱이) 한 마리를 통으로 넣고 푹 끓인 얼갈이 배추에 된장으로 슴슴하게 간을 맞춘 각재기국(1만원)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소울푸드. 비린 맛 하나 없이 신선한 맛으로 제주를 마감하는데 적절했다. #마냐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