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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Dec 31. 2023

<적절한 고통의 언어를 찾아가는 중입니다>어쩌면 저마다


저자를 실물로 먼저 봤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전형적 미녀인데 눈짓 손짓 모든게 우아했다. 그게 첫인상이다. 나는 미남 못지않게 미녀도 티나게 좋아해서 기억했다. 그런데 온라인에서 알게 되는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좀 달랐다. 누구나 일상은 때로 고단하고 심신이 지칙 마련이지만, 그녀는 또 좀 달랐다. "사르코-마리-투스 라는 희귀병과 퇴행성 고관절염이라는 상대적으로 흔한 병 사이에서, 불편함과 통증 사이를 부유하고 고통과 희망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이런..


책은 22년 1월에 나왔다. 그무렵엔 나도 상태가 별로라 책만 사놓고 읽지 못했다. 결국 23년 12월12일 김탁환쌤 북토크에 앞서 그녀와 저녁을 먹기로 하고, 전날 이 책을 읽었다. 사적으로 처음 만나는 것과 다름없는데, 기왕 책이 있으니 읽고 가야지, 뭐랄까, 사회생활 쫌 하는 이로서 최소한의 예의였다. #정부가없다 북토크 오신게 넘나 고마웠던 것도 한몫 했다ㅎ 그리고, 당연하게도, 예상대로, 책은 기대보다 좋았다. 아픔을 아는 이들끼리 통하는게 있다고 해두자ㅎㅎ


적절한 고통의 언어를 찾아간다는 자체가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서 헤엄치는 것 같다. 답도 없고, 출구도 없는 어둠과 비슷하다. 그는 "얼마나 아파야 진짜로 아픈 것일까?" 스스로 질문하곤 했다는데, 고통을 말하는데 쭈뼛거릴 필요가 없다는 건 나중에 깨달았다고 했다. "아프다는 사실 떄문에 더 아파했다"고, "스스로를 향한 연민이 너무 커서 고통의 크기를 뛰어넘는 좌절감에 함몰되었다"고 했다. 원래 내 손톱의 가시가 가장 아픈 법. 게다가 그녀의 고통은 실재했다. 고통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당사자를 고통 이상 여러가지로 괴롭힌다.

고통을 극복하는 에너지를 타인에게 얻기 위해 특별한 관계를 꿈꾸었다는 고백, 누군가에게 온전히 이해받고 싶었다는 얘기는 사실 우리 생의 본질에 가깝다. 내가 힘든 일, 혹은 나만 더 힘든 일에 울컥하는 마음은 외로움이다. 고통을 나누고 이해받기 위해 내 아픔을 전하고 싶은데, "내 고통을 이해시키겠다는 욕망은 소통이 아니라 단절의 시작"이었다는 저자의 말이 절절하다. 그리고 좀 살아본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나를 아끼고 위로해주는 가장 중요한 사람은 친구나 가족이 아니라 나다. 책의 마지막 챕터 제목이 '나를 깊이 껴안다 : 자신과 가까워지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인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내 경우, 아토피 환자라 놀림 받던 어린 시절을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한다. 열두어살 무렵, 내가 좋아하던 남자애가 그 말을 했을 때는 진짜 힘들었지. 아토피 환자라 공주병 안 걸렸다고 떠들지만 나도 스스로를 향한 연민을 부둥켜안고 살아왔다. 내가 스스로 나를 예쁘다고 받아들인 건 한참 뒤의 일이다. 가진 것 많은 인간인데 자존감 부족으로 인정욕구를 숨기지 못하는 것도 그 시절 심리적 결핍 탓이 아닌가 어줍잖은 분석도 해봤다. 어쩌면 그때 내 고통에 대해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한 탓도 있겠다.


그녀가 허우적거리면서 상처받고 상처 주는 풍경들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 저마다 이해 받기 어려운 고통을 품고 살면서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나? 몇차례의 대수술 끝에, 몇년의 재활 끝에 일상을 회복한 그녀가 무기력에 빠진 것도 어쩐지 알 것 같다. 그 무렵 그녀는 이서희 작가의 책 <관능적인 삶>을 만났다. 그녀가 인용한 대목을 재인용해본다.


"피상적 개념에서 벗어나 삶을 유지하는 감각작용의 총체로서 관능에 주목한다. 기억을 탐험하고 삶의 서사를 넘나들며 당신을 발견하는 즐거움으로서의 관능이기도 하다, 삶은 관능(적)이다."


관능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고, 사람마다 자신의 언어가 다를 수 있지만 나를 향한 진지한 탐색 너머의 감각이 아닐까? 저자는 "나를 끊임없이 증명하지 않아도 온전히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확신과 안전한 느낌을 발판으로 생겨나는 힘"으로서 관능을 찾았다. 내가 단단해지고, 내가 자유로워지는 길 어딘가에서 나도 삶은 관능적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 인상적 장면 하나. 그녀가 잘 못 걷는다고, 어색하다고 괴로워했던 자신의 모습을 타인의 시선으로 재발견하는 순간이다. 친구가 몰래 찍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실험실의 기계장치를 붙인 채 걸음걸이를 측정하고 기록하던 비틀리고 부자연스러운 내가 아닌, 낭창낭창하게 흔들리며 걸어가는 맵씨 좋은 여자가 있었다"고. 그녀 스스로 "나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꽤 괜찮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스스로 냉정하게 자신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조차 환상이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장 엄정하고 과한 기준을 들이대곤 하지만, 부질없다. 자꾸 변명하려 들지 말자. 주눅들지도 말자. 이해를 갈구하지도 말자. 우아한 미녀가 어마무지한 고통과 상처 속에 다시 선 주인공인지 알지 못했듯, 우린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귀를 기울여 들을 수는 있다. 고통의 언어를 찾아 기록한 그녀에게 말해줄 수 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우리는 저마다 관능적이라고. 이건 믿음의 영역 같기도 하지만 그리 믿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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