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국립중앙박물관 가기 전에 용산가족공원부터. 봄봄봄! 이 봄을 두고 박물관을 굳이?? 잠시 고민했으나
#스투파의_숲 전시 얼마 안남았다. 강추
2000년 전 사타바하나의 왕이 친히 후손들을 맞는다. 입술은 왜 저렇게 두꺼울까 싶지만, 부조 조각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저때 우리는 뭐하고 있었더라? 국립중앙박물관 스투파의 숲 전시는 시작부터 신비한 아우라에 홀린다. 이현주 쌤이 초대해주셨는데, 전시 마감 일주일 앞두고 달려갔다. 자영업 3주 만에 반차 낸 기분으로 해방일지를 쓰게 됐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스투파(사리탑)의 숲으로 초대됐지만 일단 인도의 만신을 잠깐 뵙는다. 2세기 작품 풍요의 신 락슈미, 풍만한 가슴을 슬쩍 과시하는 모습이 고고하다.
풍요로운 자연의 여자 정령 약시의 몸을 보면, 2000년 전부터 큰 가슴에 잘록한 허리가 미의 기준이었나?
화려하게 치장한 약시 점토판은 2000년 전 어느 부유한 인도인의 애장품이었겠지. 기념품으로 팔면 사고 싶더라. (다행히 기념품샵에 없었다)
반면 남자 정령 약샤들은 볼록 배가 인상적이다. 뾰족한 귀에 큰 눈을 지닌 정령은 연꽃 줄기를 뿜어대고, 머리에서 동전을 쏟애는 정령도 표정이 얄궂다.
이건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무렵, 그러니까 기원전 5세기 경 이란의 뿔잔.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1세가 인도 북서부에 페르시아 문명을 알린 흔적이다. 대단했던 문명.
이 전시는 조명과 미디어아트를 끝내주게 썼다. 우리 국박 일 잘한다.
기원전 400년 무렵 석가모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석가모니 시신을 화장해 사리를 여덟개의 스투파에 나눠 모셨다. 이후 150년 뒤,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은 갠지스강 유역의 스투파에서 사리를 거내 인도 곳곳에 8만4천개의 스투파를 세웠다고... 석가모니의 사리를 통해 그 가르침을 확산시킨 대단한 통치자였군.
코끼리를 타고 가는 이들은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는데.. 사리는 물론, 남은 재, 함께 담은 보석도 다 귀했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직접 제자에게, 자신의 사리를 수습하면 금으로 만든 병에 넣고 스투파를 세우라고, 사람들이 언제나 찾아아 향을 사르고 꽃을 공양하게 하라고 했다는데.. 과연??? 부처님이 나 죽으면 나를 그리 모시라 했을까? 의구심을 갖는데, 정은이 말했다. 아마 제자들이 그리 전했을 뿐 아니겠냐고. 그게 더 설득력있군)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는 태양처럼 영원히 빛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상징한다고..
석가모니의 이야기를 전하는 온갖 설화들이 있다. 움직이지 않는 왕자 이야기도 그 중 하나.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이야기를 한 장면에 넣어버린 기법도 잼나고
그 시절 신화와 설화는 버전이 수십 수백 아녔을까? 저런 조각으로 남겨진 이야기들. 단 하나의 판본만 기대하기 어려웠던 시절 아닐까. 하여간에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스에서 기독교의 상징들과 이야기를 보는 것 만큼 인도의 이야기도 몹시 흥미롭다.
석가모니 부처님.
은근 문명의 흔적들을 좋아해서, 2000년 전 로마 문명, 2700년 전 그리스 아고라, 4500년 전 피라미드 보면서 두근거렸던 인간. 잘 몰라서 그렇지 엄청난 신화를 뼈대로 한 인도 문명도 결코 만만치 않다. (몇몇 주요 유물은 다 영국 품에.. 어케 저렇게 유린했지..)
하지만 질문이 남는다. 거대한 문명의 후손들, 전세계에서 가장 수학도 잘하고, 사상가와 천재들 많이 배출한 그 땅은 왜 가고 싶은 마음이 안들까? 여행자에게 불친절하거나 불안정한 곳이라서? 인도는 왜 호감이 덜하지? 민주주의 국가 답지 않아서? 카스트 제도로 계급 차별이 여전히 남아서? 부처의 나라인 동시에 힌두교도가 80%인 인도도 분명 더 매력적인 것이 있을텐데? 왜... 아는게 없구만.
이건 펌 사진. 스투파가 온전히 남은 샨티의 모습이다.
그리고.. 박물관에 왔다면 이촌동 야래향 군만두를 먹자. 짜장면 사천탕면도 훌륭